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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번째 편지 - 여러분은 전화 잘하시나요?



누구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저는 전화와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화로 약속 잡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젊었을 때 전화로 약속 잡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시간이 안 맞아 약속을 못 하게 되면 상대방이 저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곤 했습니다.

그저 상대방은 시간이 안 맞을 뿐인데 저는 자격지심을 느낀 것입니다. 평생 검사로 살았고 심지어 검사장이 되어서도 이 트라우마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내는 전화 거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전화 거는 것이 마음먹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도 전화를 걸 때 문득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움찔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나 지인들에게 연락하는 일이 숙제입니다.

2001년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일본 총리는 오부치 게이조였습니다. 오부치는 총리 초기에 '식은 피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비서를 통하지 않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전화를하였습니다.

"여보세요. 오부치입니다." 상대방이 설마 총리일까 하고 머뭇거리면 "내각 총리대신 오부치입니다."라고 보충 설명을 합니다. 그 전화 내용은 칭찬과 격려입니다. 하루 3시간 전화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를 <오부치 폰>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김대중 대통령도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DJ 폰>을 건의하였습니다. 매일 그날의 이슈가 된 사람들에게 직접 전화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1주일을 하시고 그만두셨습니다. 직접 전화하기가 편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태생적으로 전화 걸기가 불편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과거와 달리 핸드폰이 보편화된 지금은 전화 걸기가 인간관계 형성과 유지의 핵심 수단입니다. 다행인 것은 예전과 달리 전화 걸기 외에도 소통 수단이 다양해졌습니다. 문자메시지도 있고 카카오톡도 있습니다.

저는 금년 1월 1일 2022년의 목표를 설정하면서 인간관계를 측정하고 관리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한 "측정하지 않으면 개선되지 않는다"라는 말의 신봉자입니다.

인간관계를 측정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먼저 각자가 가진 인간관계의 현황을 측정하여야 합니다. 저는 측정 기준을 <던바의 수>로 정했습니다. <던바의 수>에 대해서는 월요편지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문화인류학자이자 옥스퍼드대 교수인 로빈 던바(Robin Dunbar)가 주장한 것인데, 아무리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은 150명이라는 가설입니다.

저는 2021년 다이어리와 전화 기록에서 만나거나 통화한 사람을 찾아 던바의 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골라냈습니다. 197명이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인간관계를 1년간 측정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던바의 수 197명' 중 매달 소통한 사람은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첫째 직접 만난 사람, 둘째 전화 통화 주고받은 사람, 셋째 문자메시지 주고받은 사람, 넷째 카카오톡 주고받은 사람입니다.

매일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기재하고, 매달 197명 중 몇 명과 이런 소통을 하였는지 측정하였습니다. 실제로 해보니 던바의 수 197명 이외의 사람과 소통을 한 경우도 있어 이는 따로 측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1월은 197명 중 85명, 그 외의 사람도 30명과 소통하여 총 115명과 소통하였습니다. 2월은 197명 중 61명, 그 외의 사람도 11명과 소통하여 총 72명과 소통하였습니다. 3월(오늘까지)은 197명 중 75명, 그 외의 사람도 25명 소통하여 총 100명과 소통하였습니다.

이 숫자가 많고 적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3개월 동안 한 번도 소통하지 않은 던바의 수가 제법 많다는 사실입니다. 매달 소통한 사람을 보면 늘 소통하는 사람과 자주 소통합니다.

명단을 보면 매우 친한 사이인데도 3개월 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고 지낸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제가 인간관계를 측정하고 관리하려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측정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친한 사이도 1년에 한 번도 소통 없이 지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책들은 인간관계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상한 노력을 하여야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점점 사회생활의 폭이 좁아지고 만나는 사람이 줄어 외로워진다고 합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바뀌기도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저처럼 전화 걸기에 트라우마가 있었던 사람은 의식적인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카카오톡에는 4,655명의 친구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한번 만나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사람이겠지만 그중에 어떤 친구는 정말 친했지만 이제는 소원해진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던바의 수에서도 빠져 있습니다. 그런 친구를 찾아내는 노력도 필요할 것입니다.

은퇴를 앞둔 어느 CEO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4명씩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모임 6개를 가지고 있으면 노년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 부지런히 모임을 만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친구란 '아무 이유 없이 그의 삶이 궁금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해관계를 떠나 그가 요즘 어찌 사는지 궁금하여 문득 전화를 걸어 "어떻게 지내?" 하고 물어보는 사이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전화하는데 자꾸 이유가 붙습니다. 그리고 이유가 없으면 전화하기 어려워집니다.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4월과 5월에는 그간 소통하지 못하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전화해 보렵니다. "어떻게 지내?" 오부치를 식은 피자에서 따뜻한 피자로 만든 <오부치 폰>처럼 저도 이 봄 마음이 따뜻해지기 위해 <조근호 폰>을 열심히 누르렵니다.

여러분은 전화 잘하시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2.3.28.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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