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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월간중앙] 조근호 전 법무연수원장 “수임료는 의뢰인이 받는 행복의 대가여야 하죠”

딱딱한 검찰 조직에 ‘기업경영’방식 도입…
행복경영 전도사로 나서

오랜만에 장충체육관 앞을 걷는다. 체육관 옆으로 난 서울 성곽길 답사 때문이다. 28년간 검사생활을 마치고 한 달전 퇴임한 조근호(522) 전 법무연수원 원장과 함께 걸었다. ‘조 원장’하면서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검사의 이미지보다 기업을 경영하는 CEO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경영과 무관하게 보이던 검찰 조직에 경영 마인드를 처음 도입한 사람이 조 전 원장이다. 조 전 원장은 왜 검찰에서 경영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1995년 무렵 지청장으로 나가기 얼마 전, 지청장이 되면 한기관을 경영하게 되는 만큼 어떻게 운영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다 ‘경영’을 생각하게 됐고, 우선 경영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양대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했죠. 거기서 배운 경영이라는 개념이 무척 신선하고 재미있어 열심히 공부하고 책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해 9월 영덕지청장으로 나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뉴오피스무브먼트(New Office Movement)’를 생각해냈습니다. 사무실 환경을 개선하자는 뜻이죠. 구체적으로 사무실의 조도를 높이고 의잘르 교체했죠. 또 안쓰는 서류를 정리하니 캐비닛이 절반으로 줄었고, 캐비닛으로 막혀 있던 창문을 열 수 있어 근무 환경이 확 달라졌습니다. 민원인 대기실에도 전국 최초로 텔레비전을 설치했고요.”

비슷한 환경에서 근무한 저로서도 그 개선 효과가 충분히 짐작이가는군요.

“사무실 환경을 개선한 후에는 자원 배분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유한한 인적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하느냐 고민하다 목표치를 설정하기로 했죠. 이를테면 오래 묵은 미제사건 처리는 어느 정도가 적정할까 문제를 제기하고, 전국 검찰청 통계치를 검토해 우리 청에서는 이 정도를 달성하자 하고 목표치를 정합니다. 그러면 그 목표에 맞추어 인적자원을 쓰고 남는 자원은 다른 데 활용할 수 있죠.”
그러고 보면 조 전 원장은 이미 평검사 때부터 앞날을 준비한셈이다. 그러니 준비된 지청장, 준비된 검사장, 준비된 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었을 터였다. 장충체육관 앞을 지나 신라호텔 뒤로 난 성곽길로 오른다. 성곽은 오른쪽으로 남산을 향해 이어진다. 뒤를 돌아보니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성곽은 동호로 때문에 잘렸다. 조선이 망하면서, 서울이 팽창하면서 서울 성곽은 여기저기 잘려나갔다. 근래 제주 올레길에서 시작한 걷기 열풍으로 서울성곽길도 새로 단장하고 복원한다는데, 여기서 잘려나간 성곽도 빨리 복원되기를 바라본다.

오른쪽 아래로 내려다보니 신라호텔 영빈관이 보인다.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을 위로하는 ‘박문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의 정문으로는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을 가져다 놓았다. 흥화문은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다 1988년에야 경희궁으로 돌아갔다. 영빈관 건너편은 장충단공원이다. 장충단은 일제가 명성화후를 시해하자 전국에서 들고일어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열사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단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인 장충단이다.

‘기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일제는 그 장충단을 내려다보는 곳에 박문사를 세우고, 흥화문을 가져다 정문으로 쓰고, 광화문 석재를 가져다 정문 옆 돌담으로 썼다. 장충단에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1939년 10월에는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을 박문사로 불러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아버지의 의거를 사죄하도록 강요했다.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을 생각하며 가던 길을 계속 재촉한다. 조 전 원장이 영덕지청에서 시작한 검찰 경영은 그 후 어떻게 발전했을까?
“2004년 대구지검 차장검사로 발령받은 후에는 그동안 검찰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서 ‘프로검찰인운동’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검사의 사건 처리에는 부장검사‧차장검사‧검사장이 단계적으로 결재했습니다. 일종의 검수 라인에 세 사람이나 결재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저는 굳이 검사장까지 결재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검사장의 역할은 직원을 격려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사건 수사에 외압을 막아주는 등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검찰이 프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어떤 해결책을 찾으셨나요?

“기업처럼 생각하고, 기업처럼 행동하라’였습니다. 먼저 기업처럼 생각하도록 기업의 교육 시스템을 검찰에 도입했습니다. 직원들에게 구미의 삼성전자 직원들이 받는 ‘아리랑’이라는 감성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직원들은 쓸데없는 일을 시킨다고 난리였죠. 그런데 교육 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검찰 역사상 처음 시도하는 교육이었던 만큼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데, 강의가 끝날 무렵 직원 일부가 눈물을 흘리더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강의 끝에 연극이 있었는데, 이것이 직원들을 감동시켰나 봅니다. 이후 많은 직원이 찾아와 고맙다고 하더군요.”

많은 충격을 받았나 보군요. 그다음은요?

“이번에는 ‘기업처럼 일하자’라는 말을 내세워 혁신을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류경렬 포항제철소장이 정상명 대구고검장님을 답방했는데, 고검장님께서 이왕이면 검찰에 와서 기업 혁신 방안을 강의해달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리하여 류 소장이 검찰 직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강의하는데 ‘6시그마’이야기를 하던구요. 6시그마란 합리적 사고방식을 극대화해 올바른 기업문화를 조성하는 경영혁신운동의 하나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제가 류 소장에게 6시그마를 검찰에도 도입할 방법이 이겠느냐고 묻자. 가능하다면서 필요하면 포스코(POSCO)의 인력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검찰 최초로 대구지검에서 6시그마를 시험 실시한 후 그 경과를 묶어 제가 책을 만들어 당시 김종빈 검찰총장 내정자께 보고해 전 검찰이 6시그마운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김 총장님이 저를 대검의 범죄정보기획관으로 발령 내주셨고, 그 자리에서 혁신추진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6시그마운동을 펼쳤지요. 이 때문에 검찰 역사상 최초로 컨설턴트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개혁이나 혁신에는 개혁피로라든가 저항감이 따르게 마련인데요?

“혁신하자는 데 저항감이 없을 수 없겠죠. 어떤 조직이든 20%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피곤함을 느끼고, 20%는 적극적으로 혁신에 호응한답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60%를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혁신의 성패가 달려 있지요. 혁신을 거부하는 저항감은 혁신하는 사람의 순수성으로 풀어야 합니다. 혁신을 주도하는 사람이 혁신을 자신의 출세 도구로 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도 6시그마운동을 주도한 후 검찰에서는 한직이라고 여기는 사법연수원 부원장으로 지원해 갔습니다.”
신라호텔에서 출발한 서울성곽은 장충단길에서 다시 끊긴다.
서울시에서는 장충단길 위로 다리를 놓는다고 했다는데, 아직은 좀 더 기다려야 하나 보다. 반얀트리호텔 옆으로 내려와 길을 건너 국립극장 앞을 지나 다시 서울 성곽을 따라 오른다. 그런데 길옆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성 돌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큰 돌사이의 틈새에 작은 돌을 끼워 넣는 등 거친 모습이더니, 조금 더 오르자 그제야 성 돌의 크기가 일정하지는 않더라도 거의 틈새 없이 차곡차곡 잘 쌓아 올렸다. 아마도 앞의 성벽은 태조 때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빨리 이전하려고 공사를 급하게 서두를 때 쌓은 성벽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뒤의 성벽은 숙종 때 차근차근 착실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리라. 조 전 원장의 혁신경영도 이처럼 차곡차곡 쌓여 나갔을까?
“혁신만 계속 내세우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피곤하면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CEO는 직원들의 땀을 닦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주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입니다. CEO가 이렇게 직원을 행복하게 해주면 직원들은 자연히 고객들에게 잘해주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됩니다.”

행복경영이 그래서 나왔군요?

“그렇지요. 2008년 대전지검 검사장으로 부임하면서 행복경영을 시작했습니다. 행복경영을 위해 존중‧비전‧칭찬‧교육‧경청 등을 핵심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우선 존중을 위해 저는 기존의 검찰배치표를 뒤집어보았습니다. 통상의 배치표는 맨위에 검사장이 있고 그 밑으로 차장검사‧부장검사 순으로 내려가는데, 저는 이를 뒤집어 맨 위에 국민을 놓고 맨 아래 검사장을 배치했습니다. 이렇게 하자 배치표상 직원들이 제 위에 있으니 제가 직원들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제가 시작한 것이 ‘월요편지’입니다.”

행복경영에 이은 디자인경영
월요편지라고요?

“매주 월요일 전 직원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검사장이 새로 왔으니 또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려고 하는구나. 저러다 말겠지’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빠짐없이 매주 편지를 보내자 직원들로부터 반응이 오더군요. 이렇게 대전지검에서 일하는 동안 꾸준히 보낸 편지 42통을 엮어 <조근호 검사장의 월요편지>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고, 부산고검장으로 재직할 때인 지난해 3월에는 홈페이지 (http://mondayletter.com)까지 열었습니다. 당시 보낸 편지부터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는데 지금은 103번째 편지가 올라가 있습니다. 현재 모 출판사에서 두 번째 월요편지 팩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말쯤이면 책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존중 다음에는 비전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직원들에게 비전을 갖도록 했습니다. 1년 안에 이루기를 바라는 자신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 10개 항목을 만들어 종이에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제 차를 운전하던 직원에게도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물음에 당황하던 직원도 며칠 고민하더니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과 다이어트라고 하더군요. 그 직원은 제 앞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하고 어떻게든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국 그 직원은 몇 년 후 이 두가지 목표를 모두 이루었습니다.”

칭찬은 어떻게 적용하셨습니까?

“연말에 쓴 월요편지에서 직원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칭찬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하교, 어느 날에는 야근하는 직원들을 위해 직접 빵 수레를 이끌고 방마다 돌며 빵을 나눠주며 칭찬과 격려를 해주기도 했지요. 교육은 정기적으로 강의를 득게 한 것 외에 근무 시간 후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징검다리 휴일에는 직원들로 하여금 마음껏 휴가를 쓰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청하기 위해 저는 형식적인 간담회의 틀을 벗어나 같이 숲을 걸으면서 또는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보면서, 심지어 야구장에 가서 간담회를 했습니다. 경청을 핵심 가치로 넣은 것은 똑같은 이야기도 공감하면서 들으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말하는 사람도 훨씬 더 깊은 이야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궁금하군요.

“기강이 느슨해져 실적이 감소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간부들의 우려와 달리, 당시 대전지검 형사부가 잇따라 우수 형사부로 선정되는 등 전년도에 비해 대폭 향상된 결과로 나타났지요.”
조 전 원장의 이러한 행복경영은 그가 대전지검을 떠날 때 ‘행복한 이임식’으로 나타난다. 통상 예상되는 기관장 이임식과 달리 그의 이임식은 검찰에서는 드물게 감동의 물결을 이뤘다. 당시 직원들은 조 검사장과 함께한 10개월의 삶을 한 편의 동영상으로 만들어 이임식장에서 상영했다. 또 직원들이 직접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며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부르며 조 검사장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조 전 원장의 행복경영 이야기를 들으며 걷노라니 어느새 정상 근처다. 앞에는 친환경 전기버스가 기름 대신 전기를 충전했다. 예전에는 남산에 오르려면 오가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와 빽빽하게 주차한 차들로 인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친환경 전기버스만 출입시키고, 북사면의 신갈나무 숲과 남사면의 소나무 숲을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관리한다.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 애국가에도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후손 대대로 건강하게 물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정상에 이르니 많은 사람이 팔각정 앞계단에까지 앉아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고 있다. 팔각정 자리에는 원래 매년 신에게 국가의 안녕을 빌며 제사를 지내던 국사당(國師堂)이 있었으나, 일제가 남산식물원 자리에 신궁을 지으면서 신궁위에 있는 국사당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에 쫓겨난 국사당도 이제 원래 위치로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조 전 원장은 한 달 전 법무연수원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법무연수원에서는 또 어떤 행복경영을 펼쳤을까?
“법무연수원에서도 기족의 행복경영을 계속해나갔습니다. 법무연수원은 많은 연수생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어서 입교식과 수료식이 잦습니다. 저는 법무연수원의 최대 고객은 연수생이라고 생각하고 연수생들이 입교식 때부터 교육의 소중함을 깨닫고 열정적으로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입교식을 주재하면서 ‘로하스(LOHAS)합창단’의 축하공연과 함께 간부들이 입교식을 마친 교육생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이어 점심시간에는 원장과 간부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국을 퍼주는 ‘국퍼’시간을 가지며 교육생들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수료식 때는 교육기간 틈틈이 교육생들과 그들의 가족・상사・동료들을 인터뷰한 동영상을 틀어주었더니 장내가 환호성으로 뒤덮이더군요.”

또 다른 새로운 시도는 없었나요?

“있이요. 법무연수원에서는 행복경영외에 디자인경영도 도입했습니다. 법무연수원장으로 부임하기 전 디자인경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검찰청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하고 생각해보니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서울 하면 ‘청계천’ ‘광화문광장’ 같은 것이 떠오르는데, 검찰에는 검찰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낼 수 있는 그 무엇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검찰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낼 수 있는 디자인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차에 법무연수원장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연수원에 와보니 연수원의 중심에 법무연수원장의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고는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습니다. 연수원의 중심에는 연수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 끝에 법무연수원을 다시 디자인해 무채색 계열의 검찰 건물로는 파격적으로 대강당 앞 기둥을 마름모꼴로 바꾸면서 빨간색으로 칠하고, 옥상에는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2층에는 고급스러운 카페 분위기의 휴게실을 만들어 피아노도 놓고, 벽면에는 교육생들의 사진과 메모 공간을 만들어 서로 소통하며 친숙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연수생들이 아주 좋아하고 교육에도 열심히 임하더군요. 그 결과 수료식에서는 교육생들이 법무연수원 직원들을 위한 깜짝 공연까지 해주었는데, 연수원 직원들의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어 직원들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지요.”

대전지검에서 이임하실 때의 풍경이 겹치는군요.

“그렇지요?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공간은 단순한 공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공간이 주는 이미지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교육을 바꾸기도 합니다. 디자인이 사람을 바꾸는 셈이지요. 저는 법무연수원장을 끝으로 검찰을 나왔지만, 검찰에서 앞으로도 이런 디자인경영에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 국민은 화려한 유채색의 세상을 사는데, 공무원들은 무채색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채색의 공무원이 어떻게 유채색의 국민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검사생활 10년이면 조직폭력배같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조직폭력배를 닮아가겠습니까? 범죄자들을 다루면서 나쁜 기운이 전염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행복이라는 면역주사를 맞아야 하고, 검찰의 디자인을 바꿔야 합니다. 디자인적 관점에서 민원인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전국 민원실의 색깔과 배치를 연구하고, 조사실 역시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관점에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위기에서도 내일을 위한 준비

행복경영에서 디자인 경영까지… 조 전 원장은 검사보다 아예 전문CEO로 나섰어야 할 듯 싶기도 하다. 팔각정에서 내려와 남대문 쪽으로 내려가는데, 바로 옆에 봉수대가 서 있다. 전국에서 5갈래로 나뉘어 서울로 올라온 봉수의 종착지가 바로 이 남산봉수대다. 지금 이곳에서 보이는 연세대 뒤의 안산과 중랑구 봉화산의 봉수는 이곳 남산으로 오기 직전의 마지막 봉수대였다. 지금은 아무런 연기도 피워 올리지 않고 죽은 듯 멈춰 있지만,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 후 매일 최고 단계의 봉수가 올라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져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그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런 공황 상태일수록 지도자가 중심을 잡고 난국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선조는 자기 한 몸 살기 위해 백성들을 나 몰라라 하고 북으로 피난하기에 바빴다. 선조가 조 전 원장의 행복경영을 들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오랜만에 남산에 와보니 내려가는 길도 잘 닦아놓았다. 잠두봉전망대에서 잠시 서울 시내를 바라본다. 가을이 왔음인가? 서울 하늘을 덮었던 스모그도 거의 안 보이고, 시야는 서울을 벗어나 멀리 달려간다. 북쪽으로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뚜렷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남양주시가 백봉과 천마산을 좌우로 거느리면서 산속에 숨은 듯 보인다. 그 뒤로는 북한강 너머 화야산까지 보이는 듯싶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인천 계양산 너무 강화도 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오른쪽으로 더 멀리 보이는 산은 어디일까? 북한의 산야일지도 모른다. 남산에 올라와 이렇게 멀리까지 바라보는 것도 처음인 듯하다. 조 전 원장은 검사생활을 하면서 기획・경영 쪽으로 특성을 살려 검찰에 기여했다. 그런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을까? 
“언젠가 잠시 좌천성 인사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 내 검사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가’하는 안타까움이 일더군요. 그러나 저는 그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위기를 넘기고 정말 잘해보겠다고 결심하고 경영에 관한 책을 수십 권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결론이 나더군요. ‘기업처럼 생각고, 기업처럼 일하라!’ 다행이 광주고검에 1년 있다 바로 대구지검 차장검사로 발령 나면서 ‘기업처럼 생각하고, 기업처럼 일하라!’는 명제를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슬럼프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니! 이런 점만 봐도 조 전 원장은 CEO보다 더 CEO 같은 검사였음이 틀림없다. 계단을 모두 내려서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을 지난다. 마당의  큰 자연석에 쓰여 있는 글씨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受命: 이로움을 보았을 때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목숨을 바치라).’ 장충단 쪽에서 출발할 때는 안 의사 아들의 굴곡진 삶을 보았는데, 남산을 넘어와서는 정의를 위해 한목숨 바친 안 의사의 삶을 보게 되는 이 아이러니. 안 의사가 마당의 대(臺)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 본다. 사형을 앞두고도 의연함을 잃지 않아 간수까지 감화시켰던 안 의사는 먼저 간 세상에서 적의 신전에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죽했으면 백범 김구가 아들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까지 했을까? 아들로서도 그렇게 하기까지 무수한 강요와 협박을 받았을 것이나,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 조 전 원장의 앞에는 변호사라는 새로운 도전의 길이 놓여 있다. 항상 과거의 타성에 젖어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며 혁신과 경영을 주도해온 조 전 원장. 상행을 마치면서 조 전 원장에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지 물었다.
“변호활동에도 행복경영의 개념을 도입해 ‘행복변호’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의뢰인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겠습니다. 그래서 법률사무소 이름도 ‘행복감이 최고로 높은 곳, 행복이 가득한 대청마루’라는 뜻을 가진 '행복마루‘로 정했습니다.
행복마루…. 역시 행복경영의 전도사답다. 조 전 원장이 펼칠 행복마루에서 송사에 지친 사람들이 행복하게 쉼을 얻는 모습이 눈앞을 스쳐간다. 조 전 원장이 펼쳐놓을 행복마루가 사회 이곳저곳에도 잇따라 놓이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숭례문을 향해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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