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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번째 편지 -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오늘 아침, 마음이 답답하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가 평생을 몸담았던 한국 검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검찰총장이 직무정지를 당하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검찰에 고발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립니다. 확진자 500명을 넘나들며 코로나19 초기 상황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잘 대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위기 상황이 오고 있는 듯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두 상황 모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저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제가 삶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마다 <하이쿠>를 재해석한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위 하이쿠는 하이쿠 시인 <고바야시 잇사>가 쓴 시입니다. 잇사가 아이들과 아내가 모두 죽고 나서 쓴 시입니다. 한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시이지만 저는 불편함 마음을 추스르려 주절주절 넋두리는 넣고 싶습니다.

<삶이 힘든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옥에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는/ 내가 꽃동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옥 같은/ 내 자리도 누군가에게는/ 꽃동산일 수 있음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옥같은 잇사의 하이쿠에 불경스럽게 누더기를 입히는 이유는 오로지 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것뿐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잇사와 진정으로 만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잇사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고 일부러 따지는 것은 정말 삶이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검찰은 정말 지옥 같습니다.

하이쿠는 5·7·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짧은 시입니다. 17세기에 탄생하여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정형시의 한 형태입니다. 하이쿠 시인하면 대표적인 사람이 <마쓰오 바쇼>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바야시 잇사>를 더 좋아합니다.

<고바야시 잇사>(1763-1827)의 삶은 한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고의 삶 가운데서도 <생>에 대한 아름다움을 하이쿠로 남깁니다. 특히 참새, 개구리, 어린이 등 약하고 작은 것에 애정을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하이쿠를 읽고 나면 <생에 대한 의지>를 얻게 됩니다.

"울음 울면서/ 나무 위의 풀벌레/ 떠내려가네"

어느 날 이 잇사의 하이쿠를 읽고 덧붙인 넋두리입니다.

<어어 이게/ 무슨 소리일까/ 고개 돌려보니 / 울음 울면서/ 구조해 달라/ 손을 내저으며/ 나무 위의 풀벌레/ 자꾸만 자꾸만/ 떠내려가네/ 가는 곳을 알기는 할까>

구조해 달라고 울음 우는 것이 비단 풀벌레뿐일까요? 가는 곳도 모르는 신세는 풀벌레나 우리나 매한가지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읽힙니다.

검찰이 요란하다 못해 절규하고 있습니다. 외롭기는 나무 위의 풀벌레 신세입니다. 검찰은 자꾸만 자꾸만 이리저리 떠내려가고 있는데 가는 곳이 어디인가요. 그 목적지를 우리 모두는 알기는 아는 걸까요.

잇사는 특히 개구리에 관한 하이쿠를 많이 썼습니다. 그중 하나입니다.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오래전 이 하이쿠는 이렇게 고쳐 읽었습니다.

"하필 너는/ 나를 닮았냐/ 바싹 마른/ 몸뚱아리가/ 여윈 개구리/ 내가 다 속상하다/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내가 응원할 테니/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 보자"

지금 검찰 후배들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선배로서 해 줄 것이 없습니다. 응원하는 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또 무엇을 한다 해도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단지 이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지 마라. 우리가 여기에 있다."

요즘 법무부와 검찰이 야단법석입니다. 왜 세상은 늘 이렇게 힘들까요. 제가 검사가 된 1983년부터 지금까지 어느 한 해도 조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타인의 죄를 단죄하는 검찰의 숙명일까요.

잇사가 노래하듯 이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요.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심오한 절창에 몇 자 더 끄적거리고 싶습니다.

<자네는 아는가/ 꽃그늘 아래/ 한참을 앉아/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판 남인 사람은/ 아주 낯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게 꽃의 힘인가/ 아니면 시간의 힘인가/ 아무려면 어떤가/ 낯설지 않으면 그뿐>

꽃의 힘도, 시간의 힘도 법무부 앞에서는 검찰 앞에서는 무력한가 봅니다.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을 위하는 일인데 어찌 이리 낯 붉히며 생판 남인 것처럼 아귀다툼할까요. 화를 누그러트릴 꽃그늘은 어디에 있나요.

잇사는 나약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하이쿠를 읽어 보면 저항 시인의 면모가 엿보입니다. 당당한 절개가 느껴집니다.

"휘파람새는/ 왕 앞에 나와서도/ 같은 목소리"

저는 이 하이쿠가 참 좋습니다. 제가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늘 한결같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살아보면 알지요. 이 하이쿠에는 할 말이 많아 길게 덧붙입니다.

<젊었을 때는/ 나보다 힘센/ 사람 앞에선/ 주눅 들고/ 나보다 약한/ 사람 앞에선/ 폼 잡았지/ 휘파람새는/ 왕 앞에 나와서도/ 거지 앞에서도/ 같은 목소리/ 같은 음색으로/ 노래한다네/ 나이 들어/ 나아졌지만/ 한결같은/ 나다움이/ 왜 이리 어려운가>

검찰이 늘 검찰다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검찰이 권력 앞에서 비굴했다고 비난합니다. 그 비난의 상당 부분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검찰은 나름대로 공정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하지만 왜 그토록 오래도록 그렇게 자주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는지 곰곰이 역지사지하여야 합니다.

이 하이쿠는 시대를 뛰어넘는 경구를 담고 있습니다. "휘파람새는 왕 앞에 나와서도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였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지금 상황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이쿠를 읽다 보니 마음이 다소 진정됩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상당 기간 답답한 상황이 이어질 것입니다.

문득 30년 후 50년 후 이번 상황이 어떻게 평가될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훗날 역사가들의 몫일 뿐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11.30.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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