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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번째 편지 - 어느 기업의 좌천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얼마 전 강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강의 장소가 전남 여수라는 말에 너무 멀어 거절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강의 제안서를 보니 강의 대상이 특이하였습니다. 어느 굴지의 대기업이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좌천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이런 교육도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잠시 고민한 끝에 강의를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좌천된 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이니까요. 어떤 이야기를 할까 머릿속으로 정리를 시작하였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인사이동을 겪게 됩니다. 어떤 때는 좋은 자리에도 가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원하지만은 않는 자리에 가게 됩니다. 좋은 자리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좋은 자리를 소위 '꽃 보직'이라고 합니다. 2015년 12월 22일 327번째 월요편지 [인사이동이 된 검찰 후배님들에게]에서 '꽃 보직'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인사이동 이후 한 달만 지나면 즐거운 감정도 섭섭한 감정도 모두 사라지고 그저 일상이 되고 말더군요. 사실 중요한 것은 어느 보직이냐가 아니라 그 보직에 가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입니다.

소위 일반적으로 [꽃 보직]이라고 여겨지는 보직에서는 내로라하는 전임자들이 있어 업적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한직]이라는 자리는 상대적으로 업적을 내기 쉽습니다."

저도 공직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좌천 인사를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고등검찰관 승진 인사 때 동기생들이 두 번에 걸쳐 승진하는데 누락된 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30명, 두 번째는 15명이 승진하는데 끼지 못한 것이지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동기생 100여 명 중 45등 밖으로 밀려 나간 것입니다. 그 무렵 집안 어른이 정치적 이유로 구속되는 사태가 있어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저는 사표를 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동기생 중 46등 이후로 밀려서는 검사장은 고사하고 차장검사도 바라볼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하였습니다.

"내 생애에 언제 수사권이 주어질까?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권한을 또다시 부여받을 수 있을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다. 사표를 내더라도 6개월 후에 내고, 마지막 6개월 검사로서 최선을 다해 보자."

저는 그전의 검사 생활과는 전혀 다른 각오로 6개월의 시한부 검사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하였습니다.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수년간 할 일을 6개월에 하였으니까요. 다행히 6개월 후 동기생 22명이 지청장을 나갈 때 같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장면이 떠오릅니다. 서울지검 부장검사를 하다가 광주고검 검사로 좌천되었습니다. 표면적인 인사 명분은 사법연수원 13기 동기생 몇 명을 고검에 보내 고검을 활성화한다는 것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좌천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광주고검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좌천되었다고 스스로 의기소침하면 1년이란 인생이 낭비되니 오히려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그 1년,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좌천의 시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우스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 언제나 유효하다네. 마음은 언제나 잠 못 이루고 고뇌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기에 원치 않는 자에게도 분별이 생기는 법." 그리스 비극 [아가멤논]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공직생활 중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1년마다 인사이동되던 부산고검장 보직을 6개월 연장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이 있는 서울로 가기를 기대하였는데 부산에서 더 살 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 시절 이야기를 2010년 7월 12일 45번째 월요편지 [2기 부산고검 생활을 리셋 인생으로 여기렵니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다시 한번 똑같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정말 잘할 텐데 다짐하지만, 그러나 세월은 그런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고 앞으로 내달음칩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산고검 생활을 다시 한번 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후회하면서 꿈꾸던 리셋 인생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하루하루를 어떻게 값지게 보내야 할까요. 또다시 1년을 마치고 떠날 때 정말 후회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2기 부산고검 생활을 리셋 인생으로 여기고 살렵니다."

평생 '꽃 보직'을 쫓는 직장 생활. 그러나 늘 엇 벅자가 나는 인사이동. 그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매번 앉은 자리를 '꽃자리'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살았습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늘 비수처럼 저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좌천한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3월 5일 강의가 취소될지도 모르지만 가게 된다면 그분들에게 다소나마 힘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2.24.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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