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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번째 편지 - 뻔한 시간을 Fun한 시간으로

 

지난 주말 두물회에서 해마다 가는 가을 부부동반 1박 2일 골프모임을 갔습니다. 두물회는 가장 친한 고등학교 동창 몇몇이 모이는 모임입니다. 햇수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삼십 년은 더 된 모임입니다.

같은 사람들이 만나, 같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한 다음, 같은 숙소에 들어와 예년과 같은 모습으로 식탁에 앉았습니다. 술과 안주도 같습니다. 아마 오늘도 술에 취해 헛소리를 얼마간 해댄 후 잠자리에 들 뻔한 분위기였습니다.

누군가 '음악이 빠졌다'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작은 소형 스피커를 핸드폰에 블루투스로 연결한 다음, 평소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유튜브를 통해 틀었습니다. 처음 곡은 [Historia de un amor]입니다. French Latino라는 부녀 그룹입니다. 샹송과 라틴음악을 묘하게 접목시켜 놓았습니다.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드는 데는 이 곡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제 생각은 다섯 부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배경 음악으로 잔잔한 음악 몇 곡을 틀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모두 무엇을 할 때 음악을 틀더군." "맞아 우리 애들도 음악을 들어야 일이나 공부가 되나 봐." "우리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고 공부했잖아."

저는 이 대목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별밤지기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틀었습니다. 모두의 입에서 '아'하는 탄성이 흘러나옵니다. 이 노래는 우리를 순식간에 1985년으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H가 한마디 합니다. "우리 이문세 노래 세 곡만 듣자."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너도, 나도 이문세 노래 제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선곡은 DJ인 제 몫입니다. 저는 [옛사랑]과 [광화문연가]를 연속으로 틀었습니다.

[옛사랑]이 흘러나올 때는 모두 눈을 지그시 감고 추억에 잠겨듭니다. 저는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아마 이 노래를 들으면 모두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 압니까. 부부가 서로 다른 사람을 떠올릴지."

자신이 애처가임을 늘 공언하는 S가 이 장면에서 한 마디 안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옛사랑이 시방 사랑이야." 시방은 바로 이때를 의미하는 충청도 사투리입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시도 때도 없이 공언합니다.

저는 추억의 분위기를 현재로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B가 좋아하는 여가수 Pink Martini가 부른 [Amado Mio]를 틀면서 "이 곡은 B에게 바칩니다."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가슴 설레는 노래가 있습니다. B에게 이 곡이 바로 그런 곡입니다.

저는 모두가 좋아할 만한 곡으로 작년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삽입곡 [Stand by Your man]를 틀었습니다. Carla Bruni의 저음이 모두의 가슴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 곡이 끝날 무렵 머릿속에 한 곡이 떠올랐습니다. "이 노래 제목은 제가 아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

[I'm Your Man]. Leonard Cohen의 대표작입니다. 트렌치 코트를 입고 낙엽길을 걷는 고독한 남자의 뒷모습과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 바로 Leonard Cohen입니다. 저는 더 나이가 들면 이 남자의 모습을 닮고 싶다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분위기가 너무 처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디스코를 기억하시나요. 저희가 대학교를 들어갔던 1977년 바로 그해 디스코가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그룹 Bee Gees가 있었습니다.

저는 Bee Gees의 [Stayin' Alive]를 틀었습니다. 노래가 나오자 우리 10명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디스코 음악에 자신의 몸을 실어 신나게 흔듭니다. 콘도 거실이 디스코장이 되었습니다. 모두 1977년 명동의 디스코장 [마이하우스]에 와 있는 착각에 빠져듭니다.

저는 한 곡 더 틀어 이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바로 [Night Fever]입니다. 남녀 모두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흔들어 댑니다. 음악은 이런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증폭시킵니다.

디스코장에 가면 디스코 곡이 두어 곡 끝나면 이어 블루스 곡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남녀가 짝을 지어 춤을 추곤 했지요. 바로 그 블루스 타임에 가장 많이 나온 곡이 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입니다.

"I have often told you stories about the way. I lived the life of a drifter waiting for the day."로 시작하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한 부부 두 부부 서로 나와 블루스를 춥니다. 대학교 다닐 때 이 곡을 얼마나 들었을까요. 아마 수십 번도 더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파트너와 함께 어떤 때는 혼자.

"기억난다. 디스코를 추다가 이 곡이 나오면 파트너 없는 사람들은 우루루 자리로 돌아갔지." "기억나냐. 여자 파트너가 없는 남자 둘이 파트너가 되어 블루스 추던 모습." 모두 그때를 회상하며 낄낄댔습니다.

아내가 긴급히 한 곡 신청합니다. "여보, [Wonderful Tonight] 틀어 주세요." 이 곡도 유명한 블루스곡입니다. 이 곡을 들으니 아내에게 저절로 손이 내밀어집니다. "한 곡 추실까요."

다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빠른 춤 곡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1960년 고고춤의 대명사인 네덜란드 4인조 그룹 Shocking Blue의 [Venus]입니다. "Well, I'm your venus, I'm your fire at your desire." 그때 이 가사만 들으면 가슴이 터져 나갔습니다. 오늘 밤 4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결정타를 하나 더 준비하였습니다. 바로[Molina]입니다. 1978년 친구 몇몇과 여름방학에 강원도로 놀러 갔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야전'을 가지고 왔습니다. '야전'은 '야외 전축'의 준말입니다. 10일 내내 야전으로 [Molina]만 들었습니다. "I와 B는 그 여행 기억날 거야." I와 B는 그 여행의 동반자였습니다. "그래 생각난다. 이 노래 수없이 들었지."

이 밤 얼마나 많은 노래를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도 이 곡은 꼭 들어야겠습니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우승곡 [나 어떻게 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는 수없이 그룹사운드 명칭인 [샌드페블즈]를 넣어 찾았습니다.

왜 못 찾았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노래 제목이 [나 어떻게 해]가 아니라 [나 어떡해]였습니다. 40년 이상 들었지만 노래 제목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 어떡해]의 아련함만은 늘 같이 살았습니다.

1977년 대학을 입학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겉으로 큰소리쳤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마음은 늘 [나 어떡해]였습니다. 그런 더벅머리들이 40년이 지나 우리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이제 은퇴하였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때도 국가와 사회는 혼란했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도서관을 지켜야 했고 실험실의 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 시절에도 노래와 춤은 있었습니다. 우리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노래하고 춤춘 것이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지만, 인생이란 이런 여러 가지가 모여 모자이크를 이룬다는 것을 알 나이쯤은 되었기에 하룻밤 아무 생각 없이 추억의 늪에 스스로 빠져 한참을 허우적댔습니다.

밤 11시, 우리는 추억을 더 붙잡고 싶지만, 추억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아는 양 작별을 고합니다. 추억의 노래는 뻔한 시간을 Fun한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9.11.4.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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