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28번째 편지 - [어머님의 죽음]에서 깨달은 죽음과 삶



<죽음>이라는 추상적 단어가 <어머님의 죽음>이라는 구체적 단어로 다가온 지 15일이 지났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간접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어머님의 죽음>을 통해 죽음과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죽음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일대 셸리 케이건 교수의 책 <죽음(Death)>은 죽음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다룬 책입니다. 그 책은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등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철학적 견해를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머님의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 견해 중 어느 한 편을 지지하였습니다.

입관 때의 경험입니다. 어머님은 예쁘게 화장하고 곱게 누워 계셨습니다. 주무시는 듯했습니다. 순간 어머님에게 영혼이 없고 사후세계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무서운 공포가 밀려들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님의 끝이라 생각하니 숨이 막혔습니다. “그럴 리 없어.” “무엇인가 있을 거야.” 그 생각은 결국 “아니 무엇인가 있어야 해”로 발전하였습니다.

입관 예배 중, 평소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성경 시편 23편을 낭송하였습니다. 마지막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입니다. 저는 그 구절을 듣는 순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님의 죽음은 <이승의 집에 거하는 것>에서 <여호와의 집에서 거하는 것>으로 바뀐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고 싶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로 죽음이 끝이란 생각은 저를 극한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죽음을 둘러싼 모든 철학적 논의는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로지 위안이 되는 것은 영혼이 존재하고 사후세계가 있어 어머님의 육체는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남아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믿음>뿐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과거에는 죽음이 늘 사람들 주위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과 질병으로 자주 죽음을 목격하면서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종교의 영향력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줄고 의학 발달로 질병이 상당수 극복되면서 죽음은 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혼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이 경험의 소산이 아니라 상상의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영혼과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는 철학의 주제가 아니라 종교의 영역임을 이번에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혼과 사후세계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삶에 대한 생각입니다.

9개월 전 어머님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보행 보조기에 의지하여 걸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행복한 때였습니다. 점점 다리에 기운이 빠지시더니 일어서지 못하셨습니다.

결국 몇 달 전부터 침대에 누워 생활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식사는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식사를 직접 하지 못하셔서 콧줄로 영양분을 공급하였습니다.

그 잘하시던 말씀이 점점 줄더니 외마디 소리로 바뀌었습니다. “추워.” 훗날 이 외마디 소리가 그토록 그립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집에 계실 때는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점점 눈 뜨기 힘들어지셨습니다. 눈을 뜨시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탄성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눈을 뜨지 못하셨고 먹는 것도 불가능하여 수액주사로 영양분이 공급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소변을 누지 못하셔서 몸이 풍선처럼 부어올랐습니다. 그러고는 숨이 멎으셨습니다.

<숨 쉬고, 소변 누고, 눈뜨고, 말하고, 밥 먹고, 일어서는 행위>는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하는 당연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하는 자신을 대견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나 어머님이 죽음으로 행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는 너무도 힘든 일이 되었고, 하나씩 불가능해졌습니다.

저는 장례식을 마치고 정상적 삶을 살아가는 요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어머님에게는 그토록 힘들었던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해내는 저 자신을 봅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 기적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친구가 보내온 카톡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뭐 큰일 하느니 숭고한 일을 하느니 염병 떨지 말고, 뭐가 되었던 ‘너부터’ 잘 살아! 그게 최고의 삶이야.” 일정 부분 공감이 갑니다.

저는 기적인 일상의 행동에 감사하게 되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바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불평, 불만, 비판이 다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숨 쉴 수 없는데 눈 뜰 수 없는데 다 무슨 소용일까요?

그래도 한 가지 남는 것이 있습니다. 숨 쉬지 못하고, 소변 누지 못하고, 눈뜨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밥 먹지 못하고, 일어서지 못해도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죽음의 순간까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머님의 죽음을 향한 여정에서 어머님과 가족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사랑해” 입니다.

죽음에 대항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사랑임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죽음 직전에 깨닫게 되는 것을 우리는 지금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 사람들은 왜 이리 어리석은 것일까요?

가장 옆에 있는 사람, 가족 친구 동료 들을 사랑하는 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처럼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죽고 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님의 죽음을 통해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겼고,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과 깨달음이 세파에 쓸려나가지 않게 되길 기도해 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2.7.4. 조근호 드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