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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6 한국경제 - 한경에세이] [6주차] 그림을 그리는 이유, 그림을 감상하는 이유

“선생님은 왜 그림을 그리시나요.” “그림은 수신(修身)의 한 도구입니다. 수신 과정의 찌꺼기가 곧 그림이지요.”

최근 이우환의 위작 시비와 조영남의 대작 시비를 바라보면서 작년 가을 미술 공부 시간에 한국의 대표 화가 박서보 선생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동서양의 현인들은 한결같이 ‘인격의 완성’이라고 대답했다. 돈을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권력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라 자신을 수양해 인격을 높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인격을 완성하는지 묻지 않고 그 자체를 삶의 숭고한 목적으로 삼았다.

박서보 선생은 그림 그리는 행위를 자기 수양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비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붓글씨를 쓴 것은 대가가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수신의 한 수단이었습니다. 화가의 그림도 방법만 다를 뿐 의미는 똑같습니다.”

그는 요즘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 단색화를 주도했다. ‘묘법’ 시리즈를 통해 캔버스를 물감으로 덮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그것을 물감으로 지워 버리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되풀이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기를 수양하고 투명한 자기와 만난 것이다. 

“관람객이 선생님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얻기 원하시나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을 쉬고 치유받기를 원합니다.” 난해한 현대미술에 지친 필자에게 시원한 생수 같은 말이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호사스러운 취미 활동이 아니라 스스로 치유가 필요함을 인식한 존재의 절박한 ‘자기 치유’ 과정일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그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괴테의 말처럼 그림이 화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자기 수양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여 그들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림의 가치는 그 그림에 화가의 ‘자기 수양’ 노력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관객의 ‘자기 치유’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미술관에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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