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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번째 편지 - 법무연수원에서 만난 여덟가지 즐거움

법무연수원에서 만난 여덟가지 즐거움

  아침 출근 시간에 수원에서 서울로 고속도로를 달려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차는 많아지고 마음은 급한데 속도는 느려지지요. 양재동을 통과할 무렵에는 인내심이 바닥에 다다라 누군가 끼어들기라도 할라치면 입에서 험악한 말이 튀어나오지요. 이런 길을 반대편에서 바라보며 서울에서 수원으로 거꾸로 출근하는 제 기분은 어떨까요. 상쾌함 그 자체입니다. 뻥 뚫린 고속도로, 차창으로 지나가는 화려한 빌딩 군상, 잠시 졸다가 깨어보면 나타나는 수원 톨게이트, 이제는 고향집 지명처럼 친숙해진 ‘구성’과 ‘동백’을 가리키는 팻말, 이 모든 것들이 저에게 편안함과 기쁨을 줍니다. 이것이 법무연수원에 근무하는 첫 번째 즐거움입니다.

  멀리서 법무연수원 정문이 보입니다. 잘 정돈된 가로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 외벽에 붙인 ‘법무연수원’이라는 하얀 이름표가 저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이름표는 늘 이렇게 상냥한 모습으로 인사합니다. 새롭게 단장한 로비는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모습으로 제가 하루를 힘차게 일할 수 있도록 활력을 줍니다. 이것이 법무연수원에 근무하는 두 번째 즐거움이지요.

  오늘은 월요일이라 입교식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교육생들을 만날까 설레는 마음으로 소강당에 들어섭니다. 교육생들의 박수소리가 저를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로하스 합창단의 축하공연이 있겠습니다.’라는 진행자의 멘트에 따라 무대커튼이 젖혀지고 로하스 합창단이 당당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첫 번째 곡 ‘Eres Tu’에 이어 두 번째 곡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를 때면 소강당은 흥분의 도가니가 됩니다. 중간에 아카펠라로 부르는 대목에서는 예술의 전당에 앉아 있는 즐거운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이렇게 가끔 로하스 합창단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지요.

  매주 월요일마다 하는 국퍼에는 색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국퍼를 위해서는 다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름표가 달린 앞치마도 입어야 하고 팔뚝에 토시도 끼워야 하며 목장갑에 비닐장갑까지 끼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투명위생마스크까지 하면 준비 완료입니다. 동료 3명과 함께 배식대로 걸어가면서 식사를 준비해주신 식당 근무자들에게 정겨운 인사를 나눕니다. 교육생들을 기다리며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2, 3분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는 저만의 즐거움입니다.

  점심시간은 자연스럽게 토론시간이 됩니다. 각 분야 전문가인 연구위원, 교수들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세미나를 방불케 하는 격론이 벌어지기도 하고 미국제도의 현실에 대해 궁금할 때면 같이 자리한 Sun. E. Choi 전 미국검사에게 즉석에서 자문을 구하지요. 그 순간만큼은 저는 법무연수원장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한 명의 토론자로 참여합니다. 법무연수원과 검찰의 미래에 대해 후배들과 함께 꿈꾸는 일은 원장만의 특권이요, 다섯 번째 즐거움입니다.

  장마기간이지만 오늘은 잠시 햇살이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점심을 마치고 남는 시간에 자원자를 모아 법무연수원 뒷산을 산책합니다. 15분간의 산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즈넉한 기쁨을 선사합니다. 아무런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또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여도 좋습니다. 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속삭이는 소리, 철지난 낙엽이 발아래 부서지는 소리, 인기척에 놀라 날라 가는 까투리의 날개 짓 소리가 모든 것을 조율하여 화음을 만들어 줍니다. 봄날 꽃 사열을 해주던 키 큰 벚꽃나무는 초록색 옷으로 갈아입고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산책길 끄트머리에서 만난 정자 연화정은 늘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이지만 그런대로 우리의 쉼터가 되어 줍니다. 이제 발길이 초록의 세상에서 인공의 세상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언제나 갈 수 있는 초록의 세상이 가까이에 있음이 우리의 여섯 번째 즐거움이 됩니다.

  잠시 걸었지만 기분은 긴 산행을 한 듯합니다. 일행들은 자투리 시간을 아껴 커피숍 행복마루를 찾습니다. 이제 점심후 행복마루를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코스가 되었습니다. 일행들의 커피 값은 물론이고 기분이 나면 자리하고 있는 교육생들에게도 커피를 한잔씩 쏩니다. 한잔에 1,000원인 것이 저로 하여금 객기를 부리게 해줍니다. 갑자기 실내가 왁자지껄 해집니다. 점심을 마친 일군의 교육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웃음꽃이 피고 젊음이 넘쳐납니다. 몇몇 교육생을 불러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불편한 것은 없는지 교육은 재미있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순간 이곳이 법무연수원이 아니라 어느 대학교가 아닌가 상상해 봅니다. 교육생들과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는 행복마루가 있다는 사실이 저희가 가질 수 있는 일곱 번째 즐거움입니다.

  주말이 되었습니다. 법무연수원에서 불과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원장 공관에서 편안한 휴식을 가져보기로 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법무연수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평일과는 달리 연수원 전체가 정적에 쌓여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트랙을 걸어봅니다. 운동장에는 아직도 교육생들이 지난 금요일 남기고 간 열기가 남아 있습니다. 법무연수원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뒷산 산책로를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래되고 낡은 이 공간에 어떻게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이 공간이 어떻게 교육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이 모든 것이 제가 가진 숙제입니다. 아침 산책을 근무처에서 할 수 있는 호사스러움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만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즐거움입니다.

  저는 여덟가지 즐거움을 손꼽아 보며 일상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습니다. 즐거움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분주함에 둘러싸여 일상의 즐거움이 손짓하는 속삭임을 듣지 못하고 말지요. 대신 파랑새를 찾듯 손에 잡히지 않는 즐거움을 찾아 밤거리를 배회하지요.

  저는 법무연수원의 즐거움들을 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신가요.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시나요. 그 즐거움은 얼마동안 지속되나요. 오늘 이 순간, 여러분 주위에 있는 즐거움과의 기분 좋은 만남을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1.7.11.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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