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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번째 편지 - 건축물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대화의 산물입니다.

건축물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대화의 산물입니다.

  오늘 저는 서툰 건축 지식으로 몇 마디 하려 합니다. 사실 저는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식으로 배워본 적도 없고 집을 한 번 지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법무연수원장을 하면서 2014년 진천으로 옮기는 신축 법무연수원 기본 설계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제가 가졌던 몇 가지 생각을 아마추어 자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 생각입니다. 건축은 그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야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검찰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검찰다움’은 무엇일까요. 서울검찰청사나 대검찰청이 ‘검찰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을까요. 신축 법무연수원은 ‘법무연수원다움’을 잘 드러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아가 검찰공무원, 보호직공무원과 출입국공무원을 교육하는 기획부 강의동과 교정공무원을 교육하는 교정연수부 강의동은 누가보아도 한 눈에 각 분야 공무원들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구별되었으면 좋겠다고 설계팀에 주문하였습니다.

두 번째 생각입니다. 법무연수원의 주인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원장’일까요. ‘직원’일까요. 저는 ‘교육생’과 ‘강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원장이나 직원은 모두 교육 지원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교육에 있어 주인은 교육받는 교육생과 교육하는 강사들입니다. 건축물에 이런 사상이 반영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원장과 직원이 근무하는 본관보다는 강의동이 더 멋있었으면 좋겠고 누가 보아도 본관이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하였으면 좋겠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세 번째 생각입니다. 모든 공간배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의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공간을 희생하더라도 강의실만큼은 넉넉하고 여유있게 지어야 하고 최신 트렌드에 맞추어 계단식 강의실 위주로 지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미국여행에서 보았던 GE의 크로톤 빌 연수원이나 스탠포드 대학교의 주요 강의실은 모두 계단식 강의실이었습니다. 원장실의 면적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강의실 면적은 충분히 확보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법무연수원의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니까요.

네 번째 생각입니다. 미래를 위해 리더십 교육을 위한 공간을 만들자고 주장하였습니다. GE의 크로톤 빌 연수원을 가보니 리더십 센터가 교육의 핵심이었습니다. 직무교육은 개별 회사에서 교육하고 크로톤 빌 연수원에서는 임원급에 대한 리더십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법무연수원은 아직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장래에는 법무연수원 교육의 중심은 리더십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리더십 센터 강의동과 리더십 과정 교육생을 위한 생활관(기숙사)을 별도로 짓도록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법무공무원의 미래는 리더십 교육의 성패에 달려 있으니까요.

  다섯 번째 생각입니다. 모든 건물을 폐쇄형이 아닌 개방형, 소통형으로 설계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미국출장 길에 구글, 시스코, Aol 등 미국 최고의 기업들을 방문해 보니 사무실이 모두 개방형이었습니다. 사무실과 복도 사이의 벽이 없었습니다. 통상 우리 건물은 남쪽 사무실이 있고 이어 벽과 복도가 있고 중간에 엘리베이터나 화장실 공간이 있고 다시 복도와 벽이 있고 북쪽 사무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리콘 밸리 회사 사무실의 최근 트렌드는 남쪽 사무실 벽과 북쪽 사무실 벽을 모두 없애 남쪽 사무실에서 북쪽 사무실 창문이 보이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방형으로 만들면서도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중간 중간에 작은 방을 많이 만들어 소규모 회의나 개인 전화를 할 수 있게 배려하였습니다. 저는 이 트렌드를 설계에 반영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건물은 30년 이상 쓸 것이니까 시대를 앞서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활관을 단순히 잠자는 곳이 아닌 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설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신축 법무연수원은 서울과 거리가 있어 대부분 합숙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관이 중요합니다. 저는 생활관이 삶의 중심이 되게 강의동 및 후생관(식당, 오락시설 등이 있는 공간)과 가깝게 해달라고 하였고, 생활관을 아파트식이 아닌 다양한 구조로 만들어 교육생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활관 건물들이 중앙 잔디밭을 에워싸 교육생들이 중앙 잔디밭에서 편안히 쉬고 싶게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제 생각이 같이 일하는 팀원들의 더 좋은 생각과 만나 신축 법무연수원 설계를 처음 입찰 당선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 4월13일부터 시작한 설계변경 작업은 지난주 목요일인 6월16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설계회사인 희림건축에서 저희들과의 두 달여의 토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계안을 제시하였고 저를 비롯한 모든 회의 참석자들이 만족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더 좋은 의견이 추가될 것입니다. 저는 아마추어의 자격으로 설계변경 작업을 진두지휘하면서 혹시 ‘선무당이 사람 잡는 식’이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은 미래를 꿈꿀 있어 매우 행복하였고 많은 건축공부를 하였습니다.
 

원 설계안
변경후 설계안

  원로 건축가 우시용은 ‘건축주와 건축가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있어야 혼(魂)이 담긴 건물을 만들 수 있다. 눈먼 돈으로 짓는 공공건물 중에는 이런 대화의 과정이 없어 혼 없는 건물이 너무 많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건축주인 법무연수원과 법무부 법무연수원 건설본부의 간부들은 건축가인 설계회사 희림건축 설계팀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장시간의 회의를 통해 많은 대화를 하였습니다. 최종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훗날 저희들은 최소한 ‘법무연수원이 혼이 없는 건물’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일에 임하였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1.6.20.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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