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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번째 편지 - ‘써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써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저는 액션영화를 좋아하고 아내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해 평소 영화 고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아내가 다른 분이 너무 재미있다고 추천하였다며 가자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보자고 한 영화는 한국영화 ‘써니’였습니다. ‘과속스캔들’을 감독한 강형철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광고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로맨틱 코미디라 아내에게 봉사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봐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관객처럼 팝콘을 사들고 들어갔습니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큰 기대 없이 화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주인공 ‘임나미’는 잘나가는 남편에 예쁜 딸을 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주부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2%가 부족합니다. 우연히 어머니 병문안을 갔다가 여고시절 폭력서클 ‘써니’의 짱인 ‘하춘화’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암으로 2개월 시한부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소원이 있냐고 물어보자 죽기 전에 여고시절 칠공주 ‘써니’의 멤버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합니다. 영화는 칠공주들이 다시 만나는 과정을 현재와 25년전 여고시절을 왔다갔다 하며 보여줍니다. 저는 큰 기대없이 화면을 보다가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눈은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 머리는 이미 제가 대일고등학교를 입학하던 1974년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써니’와 같은 폭력서클이 저희 학교에도 두 개 있었습니다. 이름도 ‘맘모스’와 ‘빅스타’. 양대 서클은 학교뿐 만아니라 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정릉일대에서도 유명하였습니다. 그 서클은 범생이었던 저와는 관계없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서클 멤버였던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친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사라졌습니다.

  전남 벌교에서 1,2등 하던 모범생 임나미는 서울로 전학온 첫날 좌충우돌 하다가 자신과 전혀 다른 타입인 날나리 ‘써니’ 멤버들을 만납니다. 그들을 따라 싸움판에도 끼고, 우정 때문에 친구와 갈등도 빚지만 너무나 재미있고 신나게 놀면서 학창시절을 보냅니다. 싸움판을 벌일 때는 마치 영화 ‘친구’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남성적인 영화이지만 서클 이름과 똑 같은 가수 ‘보니 엠’의 히트곡 ‘써니’를 들으며 춤을 출 때는 영락없는 하이틴 영화입니다. 라디오 DJ ‘이종환’씨가 지어준 서클 이름 ‘써니’처럼 그녀들의 여고시절은 웃음도 울음도 기쁨도 슬픔도 있었지만 찬란하고 빛났습니다.

  저의 고교시절은 어떠했을까요. 많은 추억이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대학입시를 위해 죽어라고 공부한 기억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즐거운 추억을 만든 것은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과연 찬란하고 빛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칠공주를 다시 찾는 일은 생각만큼 가슴 뛰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은 여고시절의 꿈과 전혀 달리 냉혹하였습니다. 여자는 자고로 예뻐야 한다는 일념으로 쌍꺼풀 만들기에 온 신경을 다 쏟았던 ‘김장미’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보험설계사가 되었지만 나이어린 상사에게 핀잔을 듣는 만년 꼴지입니다. 욕쟁이 ‘황진희’는 180도로 바뀌어 우아한 사모님이 되었지만 남편의 외도로 속을 끓입니다. 귀하게 자란 치과집 무남독녀 ‘서금옥’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려던 꿈은 일지감치 접고 시어머니와 조카들을 돌보며 호된 시집살이를 합니다.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류복희’는 미용실을 하던 집이 망해 학업도 포기하고 전전하다가 마지막에는 3류 술집에서 몸을 팔고 삽니다. 하이틴 잡지의 모델로도 활약하던 얼짱 ‘정수지’는 여고시절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친구들과 헤어진 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우리네 삶처럼 누구하나 평탄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영화를 보며 친한 친구들의 고교시절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7년, 앨범에 찍힌 저와 친구의 모습에서 34년 후 미래의 저와 친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34년의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유명을 달리한 친구도 있고 경제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어려워진 친구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정이라는 무기로 25년의 세월을 뛰어 넘습니다. 현재의 ‘써니’ 멤버들은 25년 전의 모습, 느낌, 감정을 살려 현실과 관계없이 25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영화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의 우리도 가능할까요.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떠나 고교시절로 돌아가 친구들과 편하게 그 시절의 느낌과 감정으로 어울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쉽지는 않겠지만 꿈꾸어 봅니다.

 
  영화 끄트머리에 하춘화는 친구들에게 25년 전 자신들이 찍은 미래의 자신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 CD를 우송해줍니다. 영상 속에서 모두 미래의 자신들에게 그들이 꿈꾸는 미래를 이야기 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동영상 속에서 꿈꾸었던 꿈과 다르지만 모두 동영상을 보며 어제와 오늘을 돌아봅니다.

 
  저에게 그런 동영상이 있었으면 34년 전 까까머리 조근호는 미래의 조근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였을까요. 제가 꾼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꿈도 꾸지 못하고 막연히 공부만 한 것은 아닐까요. 저에게 그런 동영상은 없지만 앞으로 20년 후 미래의 조근호에게는 그런 동영상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영화는 만화와 같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길에 뒤에서 이런 소리들이 들리더군요.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봤네.’ ‘또 보러 와야겠다.’ 모두가 잠시나마 고교시절로 돌아가 울고 웃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해.’하고 말입니다. 이번 주말 고등학교 친구 몇몇을 부부동반으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1.5.30.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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