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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번째 편지 -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음악]

 

어느 해 여름 친한 친구 몇몇과 함께 용평에 있는 한 콘도에 놀러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베란다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안주 삼아 술잔을 주고받습니다. 무성하던 화젯거리가 잠잠해질 무렵,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낍니다. 저는 방에서 무선 스피커를 가지고 나와 음악을 틀었습니다.

첫 곡은 영화 대부 3부작 30주년 기념 앨범에 수록된 The City of Prague Philharmonic Orchestra의 [The Godfather Waltz]입니다. 트럼펫 소리가 밤하늘에 퍼져 나갑니다. 밤하늘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트럼펫은 영화 대부가 던지는 묵직하고도 우울한 주제를 잘 표현합니다. 어느 영화 평론가는 "The trumpet is the Godfather" 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이어지는 음악은 집시 바이올린의 대가 Sergei Trofanov와 3인조 집시 밴드 Djelem이 연주하는 [Moldova]입니다. 몰도바는 Sergei Trofanov의 고향입니다. 처연하도록 서글픈 이 음악은 이름 모를 들판에서 밤이슬을 피하는 집시 천막 위에 달빛이 내릴 때, 모닥불 가에 모여 앉은 집시 가운데 누군가가 연주하는 선율이라는 평가를 받는 곡입니다.

다음 곡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Lydia Gray가 부른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입니다. 그녀는 엘튼 존의 원곡을 재즈로 편곡하여 부릅니다. 도입부도 엘튼 존은 피아노로 연주했지만 리디아 그레이는 기타에 실어 노래합니다. 저는 원곡보다 이 곡이 더 처절해서 좋습니다.

"조 대표 모든 곡이 다 슬프네. 왜 그런 곡만 좋아해." 친구 하나가 정곡을 찔러 물어봅니다. 이 곡들은 벅스뮤직에 제가 모아 놓은 곡들입니다. 그 음악 모음의 제목은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음악]입니다. "왜 굳이 슬플 때 듣고 싶은 곡만 모았어?"

제가 왜 그런 제목의 음악 모음을 만들었는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가 그런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곡을 들을 때마다 벅스뮤직에서 음악을 찾아 모으고 그 특성을 따라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음악]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곡들은 흥겨운 곡이 아니라 음울한 곡들입니다. 왜 슬플 때 그 슬픔을 극복할 곡을 듣지 않고 더 슬퍼지는 곡을 듣는 것일까요? 저만 가진 특유한 습성일까요? 사람들은 왜 음악을 듣는 것일까요?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음악]에서 생기는 의문이 여럿입니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1925년-1995년)는 "대중음악을 가사가 없는 음악으로 나아가 추상적 음악으로 탈영토화시키면 우리는 더 세련되고 자율적인 것으로 들리는 음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에 대해 강신주 교수는 저서 [철학 vs 철학]에서 "자율성이란 작곡한 사람의 느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느낌을 극대화한다는 의미이다. 슬픈 사람은 슬픔으로, 기쁜 사람은 기쁨으로, 피곤한 사람은 나른함으로 음악에 감응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미술과 음악이 갖는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현대 미술은 화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잘 그렸는지' 묻지 않습니다. 화가가 느낀 감정을 그림에 잘 표현 expression 하였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당시의 감정과 소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미술은 사회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다릅니다. 특히 가사가 없는 음악은 작곡가의 감정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강신주 교수는 다시 설명합니다.

"추상 음악은 작곡가나 연주자가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자신도 잘 모르는 관객의 내면 감정을 극대화하여 관객의 정서를 자극한다."

저는 왜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음악]을 모아 두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슬픈 감정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도 울어서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음악이 저의 슬픈 감정을 극대화하여 더 이상 슬플 수 없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음은 우리의 내면으로 침투하고 우리를 몰아내고 질질 끌고 가고 가로지른다. 그리고는 음은 대지를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검은 구멍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를 우주를 향해 열어주는 경우도 있다. 황홀과 최면. 색깔로는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질 들뢰즈가 그의 주저 [천개의 고원]에서 표현한 내용입니다. 철학자의 글답게 어렵지만 전혀 이해가 안 되지는 않습니다. 대중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음악은 선동적입니다. 대학교 시절 데모를 할 때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들으면 감정이 북받쳐 오르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음악]들을 들어 봅니다. 김필이 부른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제가 [청춘]도 있고, 레너드 코헨의 [I'm Your Man]도 있습니다. 듣다 보니 SG워너비의 [살다가]가 가슴에 파고듭니다. 저의 슬픔을 극대화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요절한 가수 김광석이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가슴 저편에서 슬픔이 스멀거립니다. 이 스무 곡이 넘는 모음곡의 마지막은 최경식이 작곡한 [특별한 타인, 태수의 Theme]입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 말입니다.

[내가 슬플 때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있노라니 잊고 있었던 가슴 깊은 곳의 슬픔이 울음을 터뜨리더니 이윽고 음악에 실려 극대화됩니다. 들뢰즈의 말처럼 음악이 저의 슬픔을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그리고는 저를 놓아버립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저는 슬픔에서 해방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음악을 들으시면 어떤 감정이 극대화되시나요.

여러분에게는 어떤 음악 모음이 있으신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9.5.21.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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