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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번째 편지 - 어머님의 똑 같은 이야기에 인내하시나요



어머님의 똑 같은 이야기에 인내하시나요.

 
  어제는 어버이날이라 가족들이 어머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화제 끝에 어머님께서 옛날 이야기 하나를 꺼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머님으로부터 이미 열 번은 더 들은 이야기라 단 번에 제 얼굴에 지루한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동생이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엄마, 한 열 번은 들은 이야기인데.” 그 바람에 어머님은 이야기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셨고 그 이야기를 끝으로 식사는 어색하게 끝이 났습니다. 모처럼 어머님을 위해 마련 한 식사자리가 편치 않게 끝나버린 것입니다.

  어머님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하신 말씀을 또 하시는 어머님,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루해 하는 자식들, 다행이 큰 며느리인 아내가 어머님 말씀에 맞장구를 잘 쳐 그럭저럭 넘어가곤 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얼마 전 친구의 페이스북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80세의 아버지와 50세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루에 앉아 있었지요. 그 때 아버지가 갑자기 날라 온 까마귀를 보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무엇이냐?” 아들은 다정하게 “아 저거요? 까마귀에요.” 잠시 뒤 약간 치매 끼가 있는 아버지는 다시 물었습니다. “저게 무엇이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까마귀라니까요.” 아버지는 잠시 뒤 다시 물었습니다. “저게 무엇이냐?” 아들은 짜증이 났습니다. “아, 글쎄 까마귀라고요.” 아버지는 잠시 뒤 다시 물었습니다. “저게 무엇이냐?” 아들은 큰 소리 치며 “까마귀라고요! 그게 이해가 안가세요? 왜 자꾸 같은 질문만 반복하세요?” 조금 뒤였습니다.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서랍 안에 있던 자신의 때 묻고 낡은 오래된 일기장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일기장 중간 한 페이지를 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아들이 4살 때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은 창가에 까마귀가 날아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하고 물었다. 나는 아들에게 까마귀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같은 질문을 연거푸 23번을 물어봤다. 나는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며 다정히 23번 모두 대답해주었다. 같은 대답을 23번 하면서 나는 즐거웠다. 아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것이 행복했다.”

  이 이야기는 비수처럼 제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어릴 때 어머님께서는 저의 똑 같은 이야기를 백번도 더 들어 주셨을 것이고 그때마다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을 것입니다. 어머님의 그 칭찬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것입니다. 가슴에 눈물이 핑 돌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 층에 사시는 어머님께 내려가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표정에는 그 어디에도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이 없이 여느 때와 똑같이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여든 다섯이신 어머님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보다는 과거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이 더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야기는 과거로 흘러가고 그 이야기는 고장 난 레코드 판처럼 매번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에게 그 이야기는 그녀의 삶이고 전부이십니다. 자식들이 여러 번 들어 식상한 이야기일지라도 어머님에게는 자서전의 소중한 한 대목입니다.

  어머님께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어머님의 소중한 역사에 귀 기울여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열 번 아니라 백 번이라도 어머님의 이야기를 마치 전혀 처음 듣는 것처럼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하며 들어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 저희 형제를 키우면서 만들어진 이야기임에도 몇 분 안되는 시간을 어머님께 내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머님 댁을 나오며 마음으로 다짐을 하였습니다. 다시는 이런 후회를 하지 않으리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먼 훗날 저도 나이가 들어 추억의 무게가 미래의 꿈보다 훨씬 커지면 과거만을 회상할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 하면서 말입니다. 그때 제 아이들이 짜증을 내면 이 편지를 꺼내어 읽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날 이후 아빠는 똑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1.5.9.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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