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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6번째 편지 - '학습하지 않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는 존재'

 

연휴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에 걸맞게 5월이 되자 봄볕이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합니다.

"날이 너무 좋습니다. 운동하기 좋고 나들이하기 좋고 한 가지 덧붙이면 독서하기도 좋고요." 저의 운전을 도와주는 임덕진 차장의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을 듣고 문득 "그래 독서하기도 좋지. 그런데 요즘 책에 잘 눈길이 가지 않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달 광적으로 독서를 하던 제가 책 앞에 흠칫 멈춰서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독서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라는 의문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분야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 보니 어느 분야 하나 쌓이는 지식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한 가지 분야 책을 여러권 연속하여 읽기도 하지만 이내 잊어버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콩나물시루의 물이 아래로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는 원리를 믿고 1년에 책을 수십권 읽어 보지만 제 [지혜의 콩나물]은 그다지 자란 것 같지 않습니다. TV 드라마를 열심히 보거나 인터넷 웹 서핑을 열심히 하는 행위와 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 의문이 든 것입니다.

이 의문에 답을 얻을 기회가 지난 주말에 있었습니다. 노자 강의로 유명한 서강대 최진석 교수님이 고향인 전남 함평에 자그마한 생각 및 창조 공간을 만들어 입택 행사를 한다기에 봄나들이 겸 놀러 갔었습니다.

사오십명이 참석하여 최 교수님의 지론인 '새말 새 몸짓' 현판식 등 작은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모두 걸어서 읍내에 있는 육회 비빔밥으로 유명한 목포 식당에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같은 참석자인 박문호 박사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박 박사님은 원래 반도체 전문가인데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라는 자연과학 공부 모임을 10년째 이끌고 있는 분입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이라는 현상을 규명'하는 것을 공부 목표로 삼고 뇌과학, 입자 물리학, 우주론, 지질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전문가 이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뇌 과학과 137억 년 우주의 진화 강의 등 빅 히스토리 수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공부의 대가와 1시간여 단독으로 이야기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속사포로 그동안 공부에 대해 궁금하였던 모든 것을 여쭤보았습니다.

조 : "공부는 왜 하는 것입니까?"

박 : "인간은 학습하지 않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은 존재입니다. '허용되어 있지 않다'라는 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미숙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모든 것은 학습을 통해 배웁니다. 학습을 하면 예수나 석가 같은 위대한 존재로 바뀔 수도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이 나오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습하여야 합니다."

조 : "공부를 위해 이런저런 책을 읽어 보았지만 지식은 손안의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뭐 하나 머리에 정리되고 체계화된 지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전에 대한 강의를 50시간 들었습니다. 고전도 수십권 읽었고요. 그런데 모든 것이 구름처럼 막연합니다. 저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박 :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방향성입니다. 물리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책을 한두권 보다가 갑자기 철학 책을 보면 안 본 것보다는 낫지만 두 학문 모두 놓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공부 계획입니다. 자연과학도가 양자역학, 지질학, 고생물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어떻게 공부할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양자역학을 한 번에 공부할 수는 없습니다. 양자역학을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눈 다음 한 덩어리를 100일 정도 공부하고 다음 지질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조 :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독서에 대해 가진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우선 방향성이 없었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습니다. 한 분야를 100일간 독서한 기억이 없습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일본 역사를 공부한다면 일본 역사를 몇 덩어리로 나눈 다음, 한 분야 예를 들어 '메이지 유신'에 대한 책을 몇 권 정하여 100일은 공부하여야 그에 대한 지식이 정리가 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책을 읽어도 그때뿐이고 기억에 남지 않아 허무해집니다. 한 번은 어느 책을 읽고 너무 좋아 깡그리 메모하기도 하였는데 모든 책을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독서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생기는데 어떻게 해결하여야 할까요."

박 : "많은 책을 읽는다고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부를 할 때 [결정적 지식]을 만나느냐 아니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결정적 지식]은 핵심으로 이끄는 열쇠 같은 것입니다. [결정적 지식]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화학의 예를 들면 고등학교 때 배웠던 주기율표가 바로 [결정적 지식] 중 하나입니다.

주기율표를 배우지 않고 화학을 공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화학 책을 읽는 성인들은 주기율표를 외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필 책을 읽듯이 화학 책을 읽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공부가 안됩니다.

저는 같이 공부하는 분들에게 [결정적 지식]을 그림으로 그려 드리고 이해하지 말고 외우라고 합니다.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알파벳을 암기하여야 합니다. 알파벳을 이해하셨나요. 그냥 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을 공부한다면 [결정적 지식]을 그림으로 그린 것 몇십 장과 생물학 용어 100개 정도는 무조건 암기하여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이 쌓이지 않는 것입니다."

조 : "이해가 됩니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열심히 읽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없이 나오는 인명과 지명 때문에 책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아련할 뿐입니다.

그때 인명과 지명 100개 정도, 그리고 일리아드의 결정적 지식인 [각 군대의 배치도]와 오디세이아의 결정적 지식인 [오디세우스의 10년간 항해지도]를 외웠더라면 지금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제 지식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즉 팩트가 중요하군요."

박 : "조 변호사님이 지금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실을 잘 모르니 의견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토론할 때도 구체적 사실을 잘 모르니 그저 의견만 가지고 갑론을박합니다."

박 박사님과 한 시간 특별 과외를 받고 나니 제 독서가 왜 멈춰 섰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공부하여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박 박사님의 수많은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학습하지 않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은 존재입니다."

이 말씀은 5월 5일 어린이날에 받은 큰 선물이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9.5.7 .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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