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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번째 편지 -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얼마 전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저의 고3 담임이셨던 이한준 서울 반포고 교장선생님께서 정년을 맞이하셔서 제자들이 그분을 회고하는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드는데 필요한 원고를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글을 소개하려 합니다.

  1976년 봄 나는 대일고 3학년이 되었다. 나의 꿈은 좋은 대학교, 아니 더 솔직하게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는 것이었고 그 꿈을 이루는데 학교수업은 절대적이었다. 그때도 형편이 넉넉한 극소수의 아이들은 과외를 받았지만 학교 등록금도 제때 내지 못하던 나의 사정으로 과외는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그래도 꿈만은 누구 못지않았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창구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만큼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누가 되느냐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일이었다. 고3 담임은 우리 자신의 미래만 걸린 문제가 아니었다. 대일고등학교의 미래도 같이 걸린 문제였다. 대일고등학교는 신설학교로 우리가 2회 졸업 예정생이고 그나마 1회는 평준화 직전에 시험을 보고 들어와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서울대학교 입학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학교로서는 우리 학년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담임선생님으로 오신 분이 바로 지금 반포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이한준 선생님이셨다. 아마도 학교 측에서 무던히도 고민하여 고3 담임을 맡겼으리라. 그분이 하신 첫 번째 조치는 학생들의 짝을 정해 주는 일이었다. 나는 2학년 때 학교에서 3등 이내에 들었고 공교롭게도 키가 나와 비슷한 내 짝도 3등 이내에 들며 나와 각축을 벌이고 있었는데 둘 다 같은 반에 배정된 것이다. 나는 속으로 3학년에는 다른 학생과 짝이 되었으면 하였다. 그런데 이한준 선생님은 의도적으로 둘을 다시 짝으로 맺어 주었다. 이 일은 일종의 사건으로 학내에 알려졌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 둘이 3년을 같은 반에서 다니고, 2년을 짝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도 흔치 않을 일이다. 아이들의 경쟁심을 유발시키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수시로 격려해 주셨다. 특별히 수학을 잘하였던 나는 수학 담당인 이한준 선생님의 칭찬이 활력소가 되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공부하던 나로서는 선생님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힘이 솟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일고등학교에는 학사라는 것이 있었다. 과외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방과 후 학생들을 밤 11시까지 데리고 자습을 시키는 독서실이었다. 그런데 그 운영방법이 독특했다. 그 학사는 작은 방과 큰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은 방에는 20명이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문과 1등부터 10등, 이과 1등부터 10등이 성적순으로 앉았다.

1등을 하여 맨 앞에 앉아 공부하는 달과 1등을 빼앗겨 두세 번째에 앉아 공부하는 달의 느낌과 의지가 달랐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는 대로이다. 나와 내 짝은 번갈아 맨 앞자리를 다투어 앉았다.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1976년 신설 고등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한준 선생님은 거의 매일 우리와 같이 하교하셨다. 그분에게 반 학생 60명은 그분의 전부였고 열정을 발산할 유일한 대상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그분의 사랑과 열정 속에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외견 상 온화하시고 여성스럽기까지 하시지만 내면의 교육자로서의 열정과 이상은 그분을 만난 모두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한준 선생님의 열정과 헌신은 1년 후 빛을 발하게 된다. 나와 내 짝은 둘 다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하고 다음해 법학과에 들어가 졸업 후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검사로 그는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는 아직 현직에 남아있고 그 친구는 대한민국 제1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약 중이다. 까까머리 아이들의 가능성을 미리 예견하시고 그들을 평생 친구이자 경쟁자로 만들어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신 그분의 지혜와 통찰력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우리는 지금도 자주 만난다. 술잔을 기울이며 옛이야기를 할 때면 이한준 선생님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만약 우리 둘이 이한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분은 우리들의 역사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가르치신 후에도 수많은 학생들의 인생에 역사를 만들어 주셨으리라 여겨진다. 그분은 제자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제자들은 대한민국을 변화시켜왔다. 선생님은 평생을 강단에 계셨지만 사실을 대한민국을 바꾸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교육자가 계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던져 제자의 미래를 고민하시고 그들을 먼 미래로 인도해주신 분, 그분은 이제 더 이상 교육현장에 계시지는 못하시더라도 어디에서건 누군가에게 지금까지 해 오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이 만나시는 모든 사람의 삶을 바꾸는 역사를 만들어 내시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실 것이다.

  이한준 선생님,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신 은혜, 선생님께는 갚지 못하지만 대한민국의 후배들에게 대신 갚아주며 살아가겠습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늘 행복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신 분이 계신가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다행히 좋은 분을 학창시절에 만났습니다.  

  정말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납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쩌면 서로의 인생에 개입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 어떤 역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까.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0.12.6.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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