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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번째 편지 - 장대비 속 산사 음악회


봄입니다. 꽃들이 밤 도둑처럼 우리 주변에 몰래 들어왔습니다. 학교 담 벼락에는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였고 목련은 제 허락도 받지 않고 벌써 만개하였습니다. 올해 벚꽃은 너무도 조용히 피고 있습니다. 누구도 벚꽃이 피었다는 말을 크게 하지 않았는데 벚꽃 군단은 이미 제가 사는 방배동을 점령할 기세입니다. 야산에는 진달래가 고개를 빼어 들고 누가 봄 산을 찾는지 기웃거립니다.

그래도 봄에는 남쪽 나라가 제격입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사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떤 꽃이 피었을지 늘 궁금합니다. 모르는 '아무개'가 남쪽을 가자고 하면 바람이 나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은 계절입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저에게 그 '아무개'가 나타났습니다.

친구 강신장 원장이 '조대표, 다음 주 토요일 혹시 미황사 가지 않을래요. 산사에서 작은 음악회가 있어요.' 라고 속삭여 온 것입니다. 이게 무슨 횡재입니까? 산 너머 남촌을 갈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만사를 젖히고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렇게 봄바람이 나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 마을에 있는 미황사를 찾은 것이 지난 토요일 그러니까 4월 4일이었습니다.

아침 7시55분에 출발한 KTX는 10시27분 목포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겁나게 빨리 와 부렀소." 호남고속철 개통의 위력으로 2시간32분만에 도착한 것입니다. 일행들은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미황사로 향했습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그 양은 매우 적을 것이라는 말에 모두들 날씨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1시간을 달려 미황사에 도착하였습니다. 버스에 내려 서자 날씨가 만만치 않음을 금방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보다 매서운 바람이 먼저 우리를 영접하였습니다. 소풍 나온 학생들 같은 마음이었지만 봄을 시샘하는 바람에는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바람을 맞으니 지난번 이태리 피렌체 여행에서 본 우피치 미술관이 자랑하는 보디첼리의 '봄(프리마베라)' 라는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봄이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쪽 바람의 신인 제피로스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제피로스가 대한민국의 땅끝 마을까지 찾아온 모양입니다. 봄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제피로스가 강도 조절에 실패한 듯합니다. 너무 세게 불어 봄을 봄처럼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이럴 때는 먹는 것이 최고입니다. 모두들 산사의 정갈한 음식에 바람 소동은 잠시 잊은 듯하였습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주지 스님이신 금강 스님이 다른 행사 때문에 마중을 못했다고 하시며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남기면 안된다는 말에 모두 말 잘 듣는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식사 후 주지 스님방에서 차를 한잔 얻어 마시며 미황사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저와 '절친'이 되었습니다. 절에서 만난 친구이니까요?" 절친에 대한 새로운 해석, 주지 스님의 위트였습니다.

산 사에서의 차 한잔은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자신을 돌아보는 미약입니다. 속세에서 잔뜩 짊어지고 사는 멍에를 잠시 내려 놓고 스님의 말씀에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갖습니다. 어느 스님은 멈추면 보인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세대가 멈추기만 해서는 될까 하는 생각을 늘 하지만 50대에는 멈추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더 좋구요.

음악회는 3시에 열리니 1시간 반 가량 여유가 있습니다. 스님께 인사를 여쭙고 모두들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불자들은 대웅전으로, 아닌 분들은 미황사의 여기저기를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느낍니다. 사찰 뒷 편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동백꽃을 일부러 뿌려 놓은 듯 예쁜 동백꽃 카펫이 나타납니다. 겨울 내내 피었을 동백이 이제는 진달래에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아름다운 카펫이 되었습니다. 감히 그 카펫 위를 밟지는 못합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밖에 그 동백에게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다시금 옷깃을 여밉니다.

그럴 때가 아닌데 날이 어둑어둑 해지더니 비라도 한 차례 내릴 기세입니다. 바람이 너무도 세차 더 이상 밖에 머물기 어려워 졌습니다. 주지 스님으로부터 차를 얻어 마신 방으로 몇몇이 모입니다. 이야기 꽃을 피우기 딱 좋은 시간입니다. 시시껍절한 이야기에 키득거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고구마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이야기합니다. 옥수수도 생각나네요. 노닥거리고 있으려니 진행 요원이 준비가 다되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밖을 나와 보니 이게 웬일 입니까?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산 하나에 두 명 씩 끼어 쓰고 음악회가 열리는 자하루에 도착하였습니다.

200명 쯤 들어간다는 자하루 정 가운데 피아노가 놓여있고 그 둘레로 우리 일행과 사찰 식구들 약 40여명이 모여 앉았습니다. 난방이 되지 않는 곳이라 모두들 몸을 움츠리고 앞으로 전개될 광경을 마음으로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비는 장대비에서 주룩비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비소리가 점점 커져 과연 이런 소란한 상황에서 음악회가 가능할까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석자 모두 이 광경을 매우 특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냥 날씨가 좋다면 우리는 이 음악회를 그저 아름다운 음악회로만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대비가 이 음악회를 특별한 음악회로 만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드디어 음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연주자를 대표하여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서울 음대 교수님이 인사를 하였습니다. "예쁜 드레스를 가지고 왔는데 너무 추워 평상복으로 연주할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상복을 입은 최고의 연주자들, 이것 역시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프씨코드라는 악기를 위해 헨델이 작곡한 곡을 할보르센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해 편곡하였다는 그 유명한 파사칼리아가 첫 곡이었습니다. 이어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청중들을 환상의 세계로 끌고 다녔습니다. 음악회 중반 쯤 어느 분이 창문을 열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창문을 여니 밖에는 주룩비가 억수로 변해 있었습니다. 갑자기 찬공기가 방안을 휘감았고 세찬 비소리가 악기소리를 삼켜버릴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연주자들은 억수 소리와 때로는 경쟁을 하 듯, 때로는 화음을 맞추는 듯 연주해 나갔습니다. 연주회는 이미 실내 연주회가 아니었습니다, 자연속의 야외 연주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정된 4곡이 끝나고 연주자들이 인사를 하자 그새 60여명으로 불어난 청중들은 앵콜을 연호하였습니다. 첫번째 앵콜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이경선 교수님이 "이 곡은 들으시면 모두 아실 겁니다. 만약 모르시면 그때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무슨 곡이 연주될까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느리게 시작된 연주는 드디어 우리 모두가 아는 멜로디로 이어졌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바로 동요 '고향의 봄'이었습니다. 저는 그 곡조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향이 어디라도 상관없습니다. 고향의 봄에 나오는 그 '고향'은 대한민국 지도 그 어디에 있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어린 시절 마음에 있는 바로 그 곳이지요.

이렇게 비 속의 음악회는 끝이 났습니다. 모두들 일어설 줄을 몰라 했습니다. 이 감흥, 이 여운을 길게 간직하고픈 마음에서 일 것입니다. 간단한 주점버리를 하고 1박을 할 일행을 남겨두고 나머지 일행은 서울행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하염없이 창을 때리고 있습니다. 봄내음을 찾아 남도에 왔건만 남도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시 한 귀절이 생각납니다.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가 중국 4대 미인중 하나인 왕소군을 생각하며 지은 시에 나오는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국 전한시대 원제의 궁녀이었던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정책으로 흉노족 왕인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갑니다. 흉노 땅에는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습니다. 왕소군은 봄에 꽃이 피는 고향을 늘 그리워 했습니다. 훗날 시인 동방규는 왕소군의 심정을 빼어난 싯구로 읊습니다.

제가 찾은 남도에는 유화초인데 장대비를 맞고 보니 제 심정이 춘래불사춘의 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곁에는 봄이 찾아 오셨나요. 그러면 여러분의 가슴에는 어떠신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5.4.6.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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