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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번째 편지 - 함커밍데이


지난 주말 우연히 웨딩 사업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화 도중 머리 속에서 아스라히 잊혀져 있던 단어 하나가 떠올라 그 단어를 주제로 한참을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함 Coming Day"입니다. 혹시 들어보셨나요. 처음 들어보신다면 무슨 뜻인지는 추측이 되시나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주년이나 30주년이 되면 홈커밍데이라고 하여 동문회에서 모교를 방문하는 행사를 하곤 합니다. 원래 미국에서 고교 졸업 30주년에 홈커밍데이를 하였다고 하지만 성질 급한 한국에서는 고교 졸업 20주년부터 홈커밍데이를 하지요. 저도 1997년에 홈커밍데이를 하였습니다. 그 해에 저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머지 않아 다들 결혼 20주년을 맞이할 텐 데 이를 기념하여 다시 '함'을 팔면 어떨까? 이름하여 '함커밍데이'."

함을 서로 팔고 샀던 친한 친구들에게 저의 구상을 털어 놓았습니다. 다들 재미있어 하면서 결혼 20주년에 다 같이 모여 모임을 하며 함문화를 재현하면 좋겠다고 적극 찬성하였습니다. 어느 친구는 교육적 효과도 있으니 2세들도 참여시키자 고 제안하여 모임 규모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판이 커지자 저는 함커밍데이에 대한 이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느껴 이리저리 민속학 자료를 뒤적인 끝에 함커밍데이에 대한 이론을 글로 정리하여 친구들에게 보냈었습니다. 어제 저녁 컴퓨터에서 그 글을 찾아내었습니다.

"내가 함의 역사를 찾아보니 함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더군. 함은 신부 집에서 결혼에 허락해준 것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보내는 예물이라네. 함에 들어가는 예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혼서지이지. 일종의 서약서나 준수사항이네. 그리고 채단이 중요한 혼수였지. 청색, 홍색 두 색깔의 신부 치마 저고릿감이 바로 그것이라네. 결혼생활을 방해하려는 각종 잡귀를 막아준다는 다섯 색깔의 오방 주머니도 함에 빠질 수 없었지. 예전의 함진아비는 신부 집에서 함 값으로 돈을 받으면 술을 사서 신부 집안 동년 배들과 같이 마시며 서로 덕담을 나누곤 하였다더군.

함을 판지 20년, 함의 원래 의미를 어떻게 되살릴 지 고민해 보았다네. 우리 모두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20년 전 우리는 함 값을 유흥비로 탕진하였지. 사실은 신부 댁 일가친척에게 술을 사드리면서 친구인 신랑을 평생토록 잘 돌보아 주십사 부탁하였어야 하는데 말이지. 결국 우리는 옛 사람들이 만든 함 꾼들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20년이 흐르고 만 것이야. 만약 누군가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마도 함 꾼들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지. 부부들이 아직까지는 잘 살고 있더라도 그 액운이 말년에 나타나면 어쩌겠는가. 이제라도 그 잘못을 바로잡을 때가 된 것 같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결혼 20주년이 되는 해에 날을 잡아 이제는 구랑구부가 된 부부와 함 꾼 부부들 모두, 그리고 자식들까지 함께 모여 주인공 부부의 백년해로의 빌어주는 함커밍데이를 해보는 거야. 실제로 함을 준비하여 그 함에 그 옛날 혼서지에 대응하는 주인공 부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원하는 함 꾼들의 축하 메세지를 넣고, 오방주머니에 버금가는 신앙적 선물(성경, 불경, 묵주 등등)을 담은 다음 함 꾼들 각자 친구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축원하는 선물을 넣으면 어떨까? 그런데 이렇게 함을 준비하여도 그 옛날처럼 함을 사라고 외칠 수는 없으니. 함커밍데이 모임을 하는 거야.

1부에서는 친구들이 준비한 함을 전달하게 되겠지. 친구들이 주인공 부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함에서 꺼내 주면서 곁들여 축하의 글을 읽는 거지. 이어 그날의 주인공 부부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글을 읽으면 어떨까? 모두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염원하겠지. 2부에서는 그 부부가 어떻게 살아 왔는 지를 보여주는 사진 슬라이드쇼를 하는 거야. 아마도 그 사진 속에는 친구들도 많이 들어 있겠지. 2세들은 그것을 보며 인생을 배울꺼야. 당연히 결혼의 의미도 되새기고. 1부 2부를 마치고 함께 맛있는 식사하는 것으로 함커밍데이를 끝내는 거야. 식사비는 주인공 부부가 내게 되겠지. 20년 전에는 신부 댁에서 준비하셨지만 말이야. 이렇게 하면 세상에 없는 함커밍데이 행사를 하게 되는 거야. 이 함커밍데이가 널리 확산이 되면 어쩌면 중년부부의 문화로 자리 잡을 지도 모르지."

저의 이 논리에 빠져 친한 친구들이 결혼 20주년이 되는 해에 소위 함커밍데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정이 있어 25주년에 이 행사를 하였습니다.

행사를 하고 보니 결혼생활에 쉼표를 찍은 기분이었습니다. 수명이 길어져 100년 해로라는 말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30세에 결혼을 한다고 해도 중간에 헤어지지 않는다면 60-70년을 결혼생활 하게 됩니다. 함커밍데이는 부부가 결혼생활 20년만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함 꾼들의 축복 속에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고 각자 서로에게 그간 고마움을 이야기하고 앞으로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쉼표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함커밍데이의 힘으로 그 부부는 앞으로 10년, 20년 결혼생활에 닥칠 어려움을 잘 이겨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이 떨어질 때 쯤이면 다시 함커밍데이 모임을 열고 싶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부들은 각자 결혼 2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모임을 합니다. 그러나 함커밍데이는 그 어떤 모임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년이면 결혼 30주년입니다. 어떻게 축하를 할 지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함커밍데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결혼 30주년 함커밍데이 한번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5.3.23.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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