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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번째 편지 - 초성과 종성을 바꿔치는 현상에 대해

 

저는 매주 한 번 제 뇌가 점점 퇴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한 번이 바로 월요편지를 쓰는 순간입니다. 월요편지를 쓰기 위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 매주 오타가 점점 늡니다. 머리로 생각한 단어를 손가락이 받쳐주지 못 하는 일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단어의 초성과 종성을 바꾸어 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이라고 쳐야 할 단어를 '눔'이라고 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현상을 인터넷을 찾아보았지만 똑같은 현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두 단어의 초성을 바꿔서 발음하는 Spoonerism을 알게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뉴 칼리지의 학장 William Archibald Spooner가 이런 말실수를 자주 해 이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crushing blow를 blushing crow로 발음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의 경우에는 '원장님, 된장찌개 나왔습니다.'를 '된장님, 원장찌개 나왔습니다.'로 잘못 발음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저는 자판을 두드릴 때 오타가 많이 발생하고, 초성과 종성을 뒤바꾸어 치는 현상이 늘자 치매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치매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치매 검사란 1시간 정도 걸리는 인지검사를 말합니다.

검사자는 혹시 기분 나쁜 질문이 나와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왜 그런지 곧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어느 나라인가요." "대한민국입니다." "오늘이 며칠 인가요." "2019년 3월 13일입니다." "지금이 어느 계절인가요." "초봄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사실 제가 치매라서 치매 검사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저의 뇌 노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검사는 이어집니다. "제가 단어를 몇 가지 불러 드릴 겁니다. 다 들으시고 그중 생각나는 단어를 순서와 관계없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검사자는 '진달래 도마 무궁화 만년필 접시 사인펜 개나리 종이 국자 백합 솥 지우개'를 천천히 불러 주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전에 배운 연상법을 이용하여 외워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연상법이란 '진달래꽃을 도마로 눌러버렸고 그 도마 위에 무궁화 화분이 놓여 있다'라고 연상하여 외우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하니 잘 외워지지 않았습니다. 12개 단어 중 7, 8개 정도 맞추었을까요.

다음 질문입니다. "제가 숫자를 부르면 따라 해 주세요." 처음에는 세 자리 숫자를 불렀습니다. 쉽게 따라 했습니다. 네 자리, 다섯 자리 계속 숫자가 많아집니다. 제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숫자를 외우는 부분입니다. 제가 치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분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 적고 전화를 걸려면 010을 제외한 나머지 8개의 숫자를 한 번에 보고 전화를 걸지 못하고 중간에 꼭 한 번 더 보아야 합니다. 여섯 자리 숫자까지는 맞추었습니다. 마의 일곱 자리 숫자입니다. 무릎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써서 외우는 노력까지 한 결과 맞출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여덟 자리 숫자입니다. 결국 포기하였습니다.

이번에는 'ㄱ'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불러 보라고 합니다. '가방 가축 가격....'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처음 하였던 12개의 단어를 맞추는 질문은 그 후 세 번을 더 하였습니다. 결국 똑같은 질문을 네 번 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12개 단어를 신기하게도 순서대로 모두 맞추었습니다. 결국 연상법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1시간의 검사가 끝났습니다. 검사자가 검사 소견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어떻게 12개 단어를 순서까지 정확하게 다 외우셨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좋은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처럼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오타 문제와 초성과 종성을 바꿔치기하는 문제에 대해 검사자는 이렇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뇌의 속도를 손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조금 천천히 치도록 노력해 보세요. 오타가 줄 것입니다. 누구나 그런 것이니 스트레스를 받으실 필요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지난 금요일 고등학교 동창 부부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친구 하나가 '나도 전화번호 다 못 외운 지 오래되었어. 그리고 초성과 종성이 뒤바꾸어 치게 돼. 너도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친구 말을 듣고 우리 나이에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이와 관계없이 기억력이 너무 정확한 사람도 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저는 그 기억력이 참 부럽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님은 그 기억력이 참 불편하다고 하십니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잘 잊히지 않고 점점 더 또렷해진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망각이란 하나의 힘, 건강의 한 형식이다."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나아가 "사건을 새로운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망각해야만 한다." 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니체가 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의 지배를 받는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님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기억력에 대해 불편하게 느끼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어머님은 과거의 포로가 되어 버리신 것입니다.

저는 퇴화되어 가는 기억력을 어떻게 해서든 붙잡기 위해 치매 검사까지 하였지만 망각의 힘은 니체의 말대로 축복인지도 모릅니다. 저의 기억력은 점점 퇴화되고 있지만 반대로 지식을 종합하는 능력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은 점점 강화되고 있으니까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오늘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9.3.18.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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