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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번째 편지 - 사람이 개들보다 못하는 타인 감정 독법

 

얼마 전 집에서 [베일리 어게인]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평이 너무 좋아 꼭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주말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관람하였습니다. 저는 원래 테러리즘에 대한 영화를 좋아해 이런 감성적인 영화는 잘 안 보는 편인데 제가 강아지를 키우고 있어서인지 강아지에 관한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난 소감은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이 재미없어질 때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베일리라는 강아지가 환생하여 4번의 삶을 살면서 겪은 인간과의 교감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베일리는 영화 서두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사람은 들을 수 없지만. "우리의 존재 이유는 뭐지." 그래서 영화 원제도 [A Dog's Purpose] 번역하면 [어느 개의 삶의 목적] 정도 될 것입니다.

4번의 베일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이 영화의 축을 이루는 삶은 이든이라는 남자 소년과 만난 두 번째 삶입니다. 베일리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도 이든입니다. 이든과의 삶은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베일리는 이든에게 공놀이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베일리는 이든과 여자 친구 한나를 맺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든에게 불행이 다가옵니다.

미식축구 쿼터백 이든에게 사고가 생겨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미시건 대학교 4년 장학생으로 가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든은 할아버지 농장을 물려받기 위해 농업학교로 진학합니다. 베일리에게 이든과의 이별의 시간이 온 것입니다. "이든과 나는 함께여야 하는데, 이든이 없다면 내가 존재할 이유가 뭐겠어."

이든과 이별을 한 베일리는 늙고 병 들어 갑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이든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야." 그러나 이든은 없습니다. 베일리는 두 번째 생을 이렇게 마감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세 번째 네 번째 생을 잇달아 보여주며 네 번째 생에서 감동적으로 베일리는 이든과 재회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환생한 베일리를 못 알아보다가 결국 베일리를 알아보는 이든. 영화는 감동적인 마무리를 하며 끝납니다.

저는 영화를 보다가 제 옆에 앉아 졸고 있는 저희 집 강아지 [땡큐]를 바라보았습니다. 땡큐는 2살이 좀 넘은 비숑 프리제라는 견종의 수컷입니다. 땡큐는 비록 말은 할 수 없지만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합니다. 그리고 제 감정도 귀신같이 잘 읽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서면 반갑다고 두 발로 서서 저의 다리를 긁습니다. 그리고는 혀로 제 손을 핥습니다. 그의 행동만 보고 있어도 그의 반가움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소파에 앉아 있으면 제 곁에 다가와 엉덩이를 제 몸에 대고 앉습니다. 자신을 긁어달라는 신호입니다. 제가 그의 몸을 긁어주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여기저기 긁어 달라고 합니다.

제가 땡큐의 가방을 꾸리기라도 하면 자신을 데리고 나가는 줄 알고 자신이 먼저 현관에 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출근하는 때는 제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저를 귀찮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지요. 제가 "땡큐, 아빠 갔다 올게" 하고 이야기하면 슬금슬금 다가와 몸을 내밉니다. 목을 긁어 인사해 달라는 뜻이지요.

개들은 어떻게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 낼까요. 베일리도 네 번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주인 감정을 읽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베일리는 주인의 감정을 주인의 말소리로 알아채지 않습니다. 베일리는 주인의 냄새로 주인의 감정 상태를 알아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이렇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개는 어떻게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일까." 하는 주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개는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사람에게 드러냅니다. 말을 하지 못하니 잘 소통이 안 되는 답답함이 있지만, 오래 같이 있어 보면 개의 행동이 무엇을 원하는지, 개의 지금 감정 상태가 무엇인지 대부분 잘 알아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개들도 사람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따라 합니다. 개들이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고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말할 때 보이는 각종 행동에서 개들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읽어 냅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사람의 냄새가 한몫 거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개들이 사람보다 사람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서로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제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555번째 월요편지 [내가 미술공부를 하는 이유]에서 말씀드렸지만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세계의 지성들은 '타인의 감정을 읽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추상표현주의는 회화 감상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훈련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현대에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개들이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어라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막강한 도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 못 하는 개들보다 못할까요. 제가 막힌 대목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저는 역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언어가 타인의 감정을 읽어 내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를 들어 볼까요. 제가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내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바쁘게 전화를 하다가 묻습니다. "여보, 안색이 안 좋네요. 어디 아파요." 제 감정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응, 지금 너무 힘들어 당신이 나를 위로해 주면 좋겠어." 그러나 제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이렇습니다. "응 별일 없어."

언어는 제 감정과 다르게 표현됩니다. 이처럼 언어는 사람들의 감정을 솔직히 전달하기보다는 상황에 맞게 매끄럽게 계산하고 판단하여 서로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습니다. 이렇게 하여야 세련된 매너를 가진 사람이 된다고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지나치게 감정에 충실하면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회의가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누구도 "회의가 너무 지루하고 사장님이 혼자 이야기를 독점하였다"라고 혹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는 불이익을 받을 테니까요. 이처럼 언어가 우리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을까요. 최소한 부부 사이에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언어를 감정과 똑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프다, 화나면 화난다고 정확하게 표현하도록 부부 사이의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마음을 상하게도 하겠지만 효과적일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개들이 하는 방법을 따라 해보는 것입니다.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그 행동에 담긴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 내는 훈련을 해보는 것입니다. 개들도 하는데 왜 우리가 못할까요. 부부간에 하루만 말하지 말고 서로의 행동과 눈빛으로 서로의 감정을 읽어 내 보면 어떨까요.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이처럼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는데 우리는 미숙아입니다. 그 미숙함이 관계를 망가뜨리고 이별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 속 베일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은 복잡해. 개들이 이해할 수 없는 걸 하곤 하니까." 바로 그 복잡함을 만드는 주범이 언어일지도 오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9.3.11.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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