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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번째 편지 - "보고를 받지 않겠습니다."

지난 11월18일 저녁 6시반, 30분 후에 강의를 하게 될 어느 최고경영자 과정을 위해 포항공대 국제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여기 포항까지 웬 일이세요. 강의하러 오셨어요." 따발총처럼 내뿜는 인사에 어리둥절하며 쳐다보았더니 어느 소모임에서 한두 번 본 적이 있는 여성 CEO였습니다. "아, 예, 강의가 있어서요. 어떻게 여기를." "예, 저도 강의하러 왔어요. 자주 포항에 내려와요. 이따 어떻게 서울에 올라 가실 거에요. 혹시 KTX로." "예." "아마 시간이 같을 거에요. 그러면 신경주역까지 같이 가시죠." 

1시간여의 강의를 마치고 기다렸다가 그 여성 CEO와 같이 택시를 타고 신경주역으로 향했습니다. 전에 명함을 받기는 받았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 지 잘 모르는 분과 1시간의 동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변호사님은 저를 잘 모르시지만 저는 변호사님을 잘 알아요." "예." "전에 법무연수원장으로 계실 때 뵌 적이 있어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아 하는 수없이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떤 일로." "제가 PT를 한번 하러 갔었는데 제 앞에 PT를 하던 컨설턴트가 당시 법무연수원장님이시던 변호사님께 야단 맞고 PT를 못한 적이 있어요. 제가 바로 그  뒤에 PT를 한 장본인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장면이 생생히 떠 올랐습니다. 2011년 봄, 당시 대검에서는 교육 관련 컨설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컨설팅 결과물을 실제로 실행하여야 하는 곳은 법무연수원인 지라 컨설팅을 담당한 컨설팅 회사의 간부들이 법무연수원장인 저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보고 당일, 2개 컨설팅 회사 간부들이 저를 비롯한 법무연수원 간부들 1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컨설팅 결과물을 파워포인트로 보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전에 예비 지식이 전혀 없어 어떤 분들이 어떤 내용을 보고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첫 번째 보고가 시작되었습니다. 파워포인트 첫 장에는 프로젝트 명칭이 소개되어 있었고, 보고자는 두 번째 장을 열었습니다. 저는 그 파워포인트 화면을 보고 경악하였습니다. 파워포인트에는 글자가 빽빽히 적혀 있었습니다. 파워포인트가 가진 특성을 전혀 살리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워드 문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한심한  것은 제 자리에서 파워포인트 화면의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글자가 작아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형 회의실은 최고 책임자가 앉는 책상에서 파워포인트 화면까지 대략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 거리에서는 도저히 파워포인트의 글자가 인식 불가능이었습니다. 순간 파워포인트를 이렇게 만드는 컨설팅 회사라면 그 내용은 들어 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자께서 제 자리에 한번 와 보실 래요. 파워포인트의 글자가 보이시나요." 보고자 인 40대 초반의 여성 임원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하였습니다. "잘 안보입니다." "이 보고는 받지 않겠습니다. 아니 받을 가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 보고를 받겠습니다." 회의장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첫 번째 보고를 준비하였던 그 여성 임원은 물론 대검에서 인솔해 온 검사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2년간의 검찰 혁신추진단장을 경험한 후라 컨설팅이 무엇이고 어때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대검에서 이렇게 컨설팅 회사에 휘둘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검찰 후배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곁들여 있었구요. 한편으로는 그 컨설팅 회사의 여성 임원에게 자극을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고객은 안중에 없는 이런 PT를 계속하다가는 컨설팅 세계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뜻이 아무리 고상해도 나타난 모습은 괴팍한 어느 검찰 고위 간부의 심술이었습니다.

첫 번째 보고는 이렇게 무산되고 두 번째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두 번째도 여성 보고자였습니다. 첫 번째 소동이 있고 난 후라 두 번째 보고자는 조심조심 요령껏 이 위기를 잘 극복하였습니다. 저는 그 두 번째 보고자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였는데 그날 포항에서 신경주역까지 가는 택시의 동행자가 바로 그 장본인인 것입니다.

저는 오래된 기억을 떠 올렸습니다. "그날 보고 하실 때 긴장 많이 하셨겠네요." "예, 앞에 분이 보고조차 하지 못하고 쫓겨 난 상황이라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그래도 저는 야단 맞지 않았습니다." "야단이라니요. 미안합니다. 어째 상황이 그렇게 되었네요. 첫 번째 보고하신 분은 저를 엄청나게 욕 했을 것 같네요." "아니에요. 제 입장에서도 그 상황은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어요."

신경주역에서 택시에 내려 KTX를 올라타 제 자리에 앉았습니다. 많은 생각이 오고 갑니다. 세상은 이리도 좁고 무서운 곳인가 봅니다. 3년 반 전 슈퍼갑으로 살던 시절 제가 한 횡포(?). 아무리 선의로 하였다곤 하지만 횡포는 횡포일 것입니다. 그 횡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날 저는 두 번째 보고자가 보고를 마친 후 다시 첫 번째 보고자를 불러 원래 하려던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대로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PT의 핵심은 고객의 눈높이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 보고서는 보고자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태클을 건 것입니다. 당황하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오늘의 경험이 훗날 좋은 자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진심은 이것이었지만 당황하고 화가 난 첫 번째 보고자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그 컨설턴트의 입장이 되어 클라이언트 회사에 가서 우리 팀이 컨설팅 한 프로젝트를 PT 합니다. 제 PT에 불만을 가진 또 다른 조근호가 있을 수도 있음을 늘 의식합니다. 만약 지금의 저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였을까요? 적어도 그렇게 무안을 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방법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오고 가는 동안 KTX는 벌써 동대구역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입장을 바꾸어 살아 보아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저며 드는 밤이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4.12.1.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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