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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번째 편지 - '딸아이의 단기 기억상실 사건'을 통해 깨달은 것들

 

'딸아이가 일시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렸었다'는 지난주 월요편지를 보시고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셨습니다. 문자로 전화로 그리고 만나서 "이제는 정말 괜찮냐"고 물어주셨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딸아이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정말 완벽하게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그 힘들었던 경험은 그녀의 뇌 어딘가에 상처를 남겼을지도 모르지만 그 상처는 영원히 그녀의 기억에서 지워졌기를 바랍니다. 아니 아예 저장되지 않았기를 아빠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지만 그 중 두 가지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깨달음은 이번 일이 생기자마자 아내와 제가 대처하는 방식이 180도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낙관적이었습니다. "괜찮을 거예요.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이면 기억이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기다려 봅시다." 그리고 딸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기억을 되살리려고 계속 물어보고 이야기를 시켰습니다. 상황 속으로 들어가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지요. 그리곤 딸아이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저는 정반대였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며 비관적 결과에 대비하려는 몸짓을 하였습니다. 걱정이 저를 컴퓨터 앞으로 데리고 가 인터넷에서 무엇인가를 찾게 하였습니다.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가 불편하여 상황에서 떨어진 채 컴퓨터와 씨름하였습니다. 5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똑같은 질문을 100번도 더 하는 딸아이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부는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결혼을 했을까요. 참 신기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내가 저와 같은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했지만 결혼해 보니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마음 앓이도 하고 살았지만 왜 결혼은 이렇게 다른 타입이 하는지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타입이 만나 결혼을 하여야 인생을 살면서 위기에 처하였을 때 균형 잡힌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와 같은 타입의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였으면 장래를 예측하는 힘이 현저히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저와 같은 타입의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였으면 딸아이를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결혼은 이처럼 인생을 살면서 위기를 만났을 때 잘 극복하기 위해 전혀 다른 타입의 두 사람을 만나게 한 모양입니다. 물론 타입이 달라 전 세계의 모든 부부는 [부부싸움]이라는 타입 조율 시기를 거칩니다. 반대로 친구는 동성이건 이성이건 타입이 서로 같은 사람이 만납니다. 그래서 [친구싸움]이라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은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잼뱅이 일 수밖에 없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두번째 깨달음입니다. 지난주 만난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조 대표님을 뵈면 걱정이 없이 행복하기만 한 분 같은데 그런 힘든 일을 겪으셨군요." 저는 그 말에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제가 행복하다고요. 예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만큼 행복하고 다른 분들만큼 불행합니다."

이런저런 공부를 하고 인생을 살아보니 사람은 모두 같은 크기의 행복과 같은 크기의 불행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행복만 가지고 있지 않고 누구도 불행만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누구는 너무 행복할 것 같고 누구는 너무 불행할 것 같다고 여길까요.

저는 그분에게 이런 설명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만날 때 자신의 일정 부분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면 A가 B를 만날 때 B는 자신의 행복한 모습만 A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면 대개 이런 모습이지요. A는 B가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B의 연출된 행복한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지요. B의 개인적인 고통, 아픔, 부족함 즉 불행한 면은 결코 볼 수 없겠지요. 그래서 A의 B에 대한 판단은 "B는 행복하다"입니다.

반대로 A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자신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압니다. 자신의 건강, 가족 관계, 재산 관계, 성격, 교양 수준, 친구 관계, 신앙 문제, 봉사활동, 여행 등등 남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자신의 내외면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각 분야에 행복한 요소만 있을 리 만무합니다. 불행한 면들이 너무 많지요. 그래서 자신을 평가할 때는 남들보다 불행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상황이 매우 어려운 사람을 보면 순간 그는 불행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은 그보다는 행복하다고 속단합니다. 그러나 불행해 보이는 그 사람의 속 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거지처럼 초라해 보여도 통속에 살고 있는 디오게네스일 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잘 알지만 다른 사람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착오가 생기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님은 이야기합니다.

"진짜 누구를 안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보통 사람들이 많이 하는 오해 중의 하나가 이런 오해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알지만 너는 나를 몰라.' 실제로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대화가 많이 오고 가지요. 이런 일이 왜 벌어질까요. 사람들은 왜 이런 착각을 하고 사는 것일까요. 내가 상대방을 안다고 할 때 그 아는 것의 단서와 상대방이 나를 알아야 한다고 할 때의 그 단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최 교수님이 말하는 '내가 상대방을 안다고 할 때 그 아는 것의 단서'는 [너의 행복한 겉모습]입니다. 단지 그의 행복한 겉모습만 알면서도 그를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반면 '상대방이 나를 알아야 한다고 할 때의 그 단서'는 [나의 불행한 속 모습]입니다. 그도 사실 [나의 행복한 겉모습]만 보고 나를 다 안다고 말하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나의 불행한 속 모습]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너는 나를 모른다'고 애절하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두 자신과 남의 인생을 비교할 때 남의 [행복한 겉모습]과 나의 [불행한 속 모습]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의 모습이 어찌 행복하기만 할까요. 그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불행한 속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또 저의 모습은 제가 느끼듯 불행하기만 할까요. 남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행복한 겉모습]도 있는 것이지요.

이번 딸아이의 기억상실 해프닝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말씀드린대로 저는 두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성격이 다른 아내와 저는 위기 극복을 위한 최적의 조합이라는 사실]과 [우리 모두는 같은 크기의 행복과 불행을 가지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자신이란 인간을 체험하는 것"이라는 니체의 말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인생이 그렇게 쉽지도 그리고 그렇게 어렵지만도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저 저 자신을 체험할 뿐이지요. 그런데 그 체험 속에 이렇게 다양한 소재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수십편의 대하소설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11.12.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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