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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번째 편지 - "아빠 나 결혼했어?"

 

지난 금요일 저녁 차를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놀라지 마세요. 윤아가 운동을 하다가 떨어져 머리를 부딪쳤대요. 뇌 CT를 찍어 이상은 없다는데 최근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 저녁 먹고 있으니 곧 데리고 갈게요."

집에 도착해 조금 기다리니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딸아이는 머리만 아프다고 할 뿐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왜 머리가 아픈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떨어졌나 봐."하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다음이 더 가관이었습니다. "나 결혼했어."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까? 안 했다고 하니까 "나 남자 친구 있어" 하고 물었습니다. 없다고 했더니 "거지 같네"하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5분 후 다시 윤아가 물었습니다. "나 결혼했어." 장난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안 했어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곧 "나 남자친구 있어."하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5분 후 윤아는 또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 결혼했어." "나 남자 친구 있어." 이렇게 같은 질문을 100번도 더 하였습니다. 바로 5분 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최근 일을 물었습니다. 딸아이의 기억은 일정 부분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오늘이 며칠이야." "응 언제지" "그러면 계절이 언제야." "여름인가?" "여름인데 스웨터를 입었겠냐. 오늘 11월 2일이야." 딸아이와 아내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오바마." "아니야. 트럼프 대통령이야." "그러면 한국 대통령은 누구야." "이명박." "아니야. 문재인 대통령이야." 최근 기억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이 뒤죽박죽된 모양입니다. 다행히 우리가 누군지는 알아보았지만 최근 3개월 동안 집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괜찮을 거예요.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이면 기억이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기다려 봅시다." 아내의 위로의 말에 안심은 하였지만 "나 결혼했어."하고 또 되묻는 딸아이를 보면 안심할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병원장을 한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뇌 사진상 이상 소견만 없으면 뇌출혈이 없는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일주일이면 기억이 돌아올 거야. 그런데 놀라긴 많이 놀랐겠다."

딸아이는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여 얼음찜질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게 하였습니다. 자라고 하였지만 잠이 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내는 기억을 되살릴 요량으로 계속 이것도 기억이 나냐 저것도 기억이 나냐고 물었습니다. 계속 묻자 어느 것은 기억이 살아나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5분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5분 전에 나눈 대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만난 상황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저의 걱정하는 습관은 저를 딸아이가 이 상태로 평생 살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몰고 갔습니다.

딸아이가 제 방에 들어왔습니다. 딸아이는 5분 전 일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 아내와 수다를 떨 때는 연신 웃으며 그 상황 자체를 재미있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서 있는 딸아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한 것입니다.

저는 딸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겁이 나고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위로해 주어야 했습니다. "걱정하지마. 내일 자고 일어나면 다 기억날 거야." 딸아이는 저를 껴안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이었습니다. 삶에는 많은 시련이 숨겨져 있나 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겨 우리를 시련의 골짜기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걱정되어 아내더러 딸아이와 같이 자라고 하고 혼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걱정은 걱정할수록 걱정거리를 재생산하는 법입니다. 억지로 잠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새벽 5시 잠이 깼습니다. 3시간도 못 잤는데 걱정이 잠을 깨운 모양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딸아이 방에 가보니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걱정이 저를 컴퓨터 앞으로 데리고 가 인터넷에서 무엇인가를 찾게 합니다. 여러 가지 검색어를 넣어 봅니다. '기억상실' '기억장애' 이것저것 찾다가 드디어 딸아이의 상황을 설명하는 글을 찾았습니다.

"단기 기억상실증은 뇌에 손상을 받은 시점으로부터 잃어버린 기억이 손상 전인지, 후인지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보면,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고로 뇌를 다친 후 사고 전 기억의 일부나 전부를 잊어버린다. 이 경우를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이라고 한다.

반면, [첫 키스만 50번째] 영화의 주인공은 몇 년이나 지났지만 기억은 사고를 당하기 전 시간에 머물러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눈을 뜨면 항상 사고를 당한 똑같은 날을 살면서 사고 이후 있었던 나날들에 대해서는 그게 비록 어제 일일지라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를 순행성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로 분류한다."

딸아이는 역행성 기억상실과 순행성 기억상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을 더 뒤지다가 좀 더 알아내었습니다.

"뇌 외상으로 인한 일시성 전반적 기억상실(transient global amnesia)은 갑자기 발생하고 대개 하루 안에 회복되는 기억장애로서 증상을 보이는 동안에는 심한 순행성 기억장애를 보여 기억 등록이 안 되므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회복 후에는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장기적인 기억장애로 진행하지는 않고 뇌혈관 질환, 편두통, 간질 등의 질환과 연관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예후가 좋다."

이 글을 보니 왜 딸아이가 지난 몇 개월 일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또 5분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역행성 기억상실은 기억은 하고 있되 정보를 인출하는 [점화] 작용에 장애가 생긴 것이고, 순행성 기억상실은 기억 자체를 하지 못하는 즉, [등록] 작용에 장애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루 안에 회복'된다는 문구와 '예후가 좋다.'는 문구가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소리쳤습니다. "윤아 기억이 돌아왔어요. 다 기억이 난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딸아이는 전날 사고가 난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에 [등록]이 안 된 것입니다.

윤아의 기억상실은 하루 만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기억을 되살리는 능력]과 [기억을 등록하는 능력]은 우리가 가진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평소 그것이 선물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이번에 사고를 통해 그것이 너무나도 크고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욕심을 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고, 더 많은 것을 하고 싶고, 더 많은 곳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기억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 자신입니다. 기억한 것을 끄집어낼 수 있고 기억하고 싶은 것을 등록할 수 있는 이 능력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고 싶은 날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11.5.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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