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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번째 편지 - 눈이 만든 아름다운 추억

눈이 만든 아름다운 추억

 주말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강원도는 눈 폭탄을 맞아 교통이 마비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우리에게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이 눈과 어떤 추억을 만드셨나요. 저는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요즘 저는 주말이면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어느 골프장 안에 있는 콘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예 전세를 내서 일부 짐을 이사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세컨 하우스가 된 셈이지요.

 일요일 아침 그곳에서 자고 일어나 창밖을 보았더니 베란다 앞 골프장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새벽에도 골프 치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골프장이 아무도 없이 조용한 흰색 설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창틀을 통해 보는 장면은 그대로 작품입니다. 그림 같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아는 분들과 함께 소식을 나누고 있는 ‘밴드’에 올렸습니다. 혹시 약 올리거나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 같게 느껴질 수 도 있지만 이 장면을 저희 부부만 즐기기에는 너무 아까워 이런저런 고민을 젖혀두고 전송하였습니다. 그중 일부를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느낌이 오시나요. 저희 부부는 이 눈 밭을 걸어보기로 하였습니다. 교회를 갔다 와서 2시경부터 완전 무장을 하고 골프채를 하나 들고 9번 홀부터 거꾸로 8번, 7번 이렇게 1번 홀까지 걸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언제 눈 덮힌 골프장을 아무도 없이 저희 부부만 걸을 수 있을까요? 골프장 관계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릴 적 눈이 내리면 강아지가 눈 밭을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생각이 납니다. 아마도 그 강아지도 지금의 저의 심정과 같았을 테지요.

 9번 홀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소 골프 칠 때와는 달리 그린에서 티박스로 거꾸로 걸었습니다. 많이 쳐 본 홀이지만 이렇게 거꾸로 걸으니 풍경이 전혀 딴판입니다.

 하얀 파우더가 뿌려진 것 같은 눈 밭을 걷기가 미안해 집니다. 하늘에서 누군가가 작품을 만드시려고 똑 같은 높이로 땅 위에 파우더를 곱게 뿌려 놓았는데 못된 놈들이 성큼 성큼 허락도 없이 들어와 파우더에 그들의 발자국을 남기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속상하기 그지 없으실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정성 드려 만든 작품인데 이 놈들이’하는 생각이 드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백옥 같은 눈 밭에 발자국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아내는 눈에 빠지기 싫다며 저의 발자국을 한발 한발 디디며 따라 옵니다. 30미터 쯤 걸었나 봅니다. 뒤돌아보니 똑바로 걷겠다고 신경 써서 걸은 길이 삐뚤 빼뚤 합니다.

 아내도 그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니 삐뚤 빼뚤 합니다. 그 발자국을 보면서 우리네 인생 길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반듯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면 삐뚤 빼뚤, 우리 뜻대로 된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뒤를 돌아보고 반성하여야 하나 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디 반듯하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반듯하게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술 취한 사람의 발자국처럼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는 것도 멋이 있지 않나요. 너무 자주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은 아이들이 저 발자국을 보고 따라 올 테니 저의 인생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인생을 위해서 라도 가급적 반듯이 살아야 할 테죠.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다 보니 9번 홀 티박스에 올라섰습니다.

 9번 티박스에서 그린까지 바라보니 평소 파랗던 잔디밭이 새하얀 색으로 바뀌어 있어 느낌이 전혀 다르네요.

 우리는 8번 그린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라! 이곳 그린은 골프장 직원들이 눈을 다 쓸어 놓아 잔디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공을 꺼내 놓고 그린을 향해 이리 저리 골프 연습을 해 봅니다. 골프장 오너라 해도 이리 해 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를 놀았는지 모릅니다. 아내와 번갈아가며 그린 주변에서 이런저런 연습을 해봅니다. 아무런 제한 없이 마음대로 골프장 그린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순간 만은 저는 골프장 오너입니다. 생각을 바뀌 봅니다. 제가 골프장 오너이고 눈이 내린 골프장을 점검 중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더 여유 있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린 주변에서 노는 것이 슬슬 싫증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티박스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눈을 쓸어 공 칠 자리를 만들고 빨간색 공을 바닥에 놓고 채로 치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것도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입니다. 눈이 있기도 하고 옷도 껴 입어서 스윙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몇 백 미터를 이렇게 공을 치며 전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신이 나던 이 일이 점점 시큰둥 해집니다. 눈치를 보니 아내도 처음과는 달리 별로 재미가 없나 봅니다. 저는 무한 자유라는 것이 반드시 무한 재미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평소 골프가 재미있는 것은 여러가지 제약 속에서 재미를 찾기 때문인가 봅니다. 아마도 부킹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치면 그것도 시들하겠지요. 저 혼자 마음대로 치고 다니면 그것도 별로 일 것입니다. 네 명이 규칙에 따라 적당한 긴장감 속에 경쟁을 하니 그 속에서 재미가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우리네 인생도 무한 자유를 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 일 것입니다. 적당한 제약과 부족함 속에서 찾아지는 즐거움이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무한 자유의 허망함을 맛보고 그냥 걷기로 하였습니다. 8번 홀을 거쳐 7번 홀로 넘어갔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고 아무도 다녀간 흔적 마저 없습니다. 가끔 고라니 발자국만 눈에 띕니다. 그런데 고라니 발자국은 일자로 똑바로 골프장을 횡단해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강아지처럼 눈 위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골프장에 붙여 지어 놓은 콘도가 한 폭의 그림입니다. 눈은 모든 것을 작품으로 바꿔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오후가 깊어질 수록 온도가 내려가고 가끔 바람도 불어 점점 을씨년 스러워집니다. ‘고요하다. 정막하다. 잠잠하다. 그윽하다. 조용하다. 평화롭다,’는 단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갑니다.

 눈을 감고 눈 밭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뎌 봅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요? 시간의 개념이나 거리의 개념이 사라지고 누군가 시간을 정지 시켜 놓은 것 같습니다. 이 느낌을 어떻게 기억 속에 간직할까요? 스마트 폰으로 찍은 사진이 이 순간의 느낌을 포착할 수 있을까요? 이 순간의 느낌을 담아 먼 훗날 다시 되살려내는 기기가 있으면 좋을 듯합니다.

 6홀 5홀 4홀을 말없이 걷기만 하였습니다. 이 장엄한 경치 앞에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아내도 아무런 말없이 걷기만 합니다. 한 시간 반 쯤 흘렀나 봅니다. 멀리 3번홀 그린에서 누군가가 사진기를 눈 꽃에 들이대고 있습니다. 이제 골프장을 그분에게 내드리고 우리 부부는 비켜야 할 것 같습니다. 골프장 오너 놀이는 이쯤에서 멈추기로 하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도로를 따라 잠시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살면서 쉽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눈이 적당히 내리고 날씨도 그다지 춥지 않아야 하고 특히 그 눈이 주말에 내려야 하니 이런 조합이 쉽겠습니까? 저는 운이 좋게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추억을 만드셨나요? 인생 별거 있나요. 이런 추억이 많으면 멋진 인생이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4.2.10. 조근호 드림

 (방송 안내)

 작년 4월15일부터 매주 월요일 10시부터 11시까지 방송되는 극동방송(AM 1188 또는 FM 106.9) ‘사랑의 뜰안’ 프로그램에 조근호 변호사의 월요편지 코너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월요편지 중에서 일부를 골라 청취자 분들에게 제 육성으로 전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은 대략 10:20경입니다. 시간이 나시면 들어 주세요. 새로운 감흥이 있으실 것입니다. 라디오 듣기가 불편하신 분은 스마트 폰에 극동방송 앱을 다운 받으시면 그 시간에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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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그 동안 쓴 월요편지를 묶어 펴낸 오늘의 행복을 오늘 알 수 있다면’(21세기 북스 출판)에 대해 여러분들이 큰 관심을 보이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세는 좋은 곳에 쓰려고 고민 중입니다. 계속 응원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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