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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번째 편지 - 즉문장답(卽問長答)

 

어느 잡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지를 보내왔습니다. 통상의 인터뷰 질문지와 달리 즉문즉답이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간단한 질문에 간단하게 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전에 이 코너 인터뷰하신 분들의 즉문즉답 내용을 보니 답변이 한두 줄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내용으로 오늘 아침 답변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으로 오늘 인터뷰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순간, 이 질문에 대해서는 즉문즉답이 아니라 즉문장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잡지에는 실리지 못할 테지만 제 마음껏 답변하고 싶어 오늘 월요편지를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쓰렵니다. 아직 그 질문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이 불덩어리처럼 제 마음에 남아 있을 때 쓰고 싶은 것입니다.

 

 

 

1. 10대 시절 장래의 희망은?

어려서 다른 학생들보다 꽤 수학을 잘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문이과를 나눌 때 이과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어렸을 적 퀴리 부인 전기를 읽고 가슴 설렜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대학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가는 것이 고등학교 1학년 조근호의 꿈이었습니다.

물리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용 비커를 바라보는 사진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과를 희망하였다는 제 말을 들은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시며 문과를 가서 법대를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고검장까지 하고 변호사를 하도록 만든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물리학에 대한 미련과 향수가 남아있습니다. 법원도서관장까지 지낸 강봉수 변호사께서 66세에 미국 대학교로 물리학을 배우러 유학 가셔서 73세에 박사학위를 받으셨다는 뉴스를 몇 년 전에 접하고 얼마나 부럽고 가슴 뛰었는지 모릅니다.

2. 20대에 가장 몰두 했던 것은?

스물세 살에 검사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사회 경험이 없이 검사가 되어 28년을 살았습니다. 인생에 대해 고민하거나 사회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치스럽고 배부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방황도 해보고 좌절도 해보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방황하는 아들, 좌절하는 딸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방황과 좌절을 이해할 진정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채 머릿속 상상만의 방황과 좌절로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검사가 되면서 마음으로 새긴 것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람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그리고 그것을 좌표 삼아 흔들리고 옆길로 새는 저 자신을 붙들어 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방황과 좌절을 직접 겪었더라면 방황하고 좌절한 사람을 다루는 검사를 더 의미 있게 하였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3. 40대에 품었던 인생의 목표는?

40대 초반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옆에서 지켜보았지요. 세상을 바꾸려면 검찰을 바꾸어야 했고 그 검찰을 혁신경영과 행복경영으로 바꾸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지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변화, 혁신, 행복 이런 주제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하고 실천도 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니 다 사라지고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니 단 하나 남았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제도를 바꾼 것은 정착되지 못하거나 다시 회귀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은 한가지는 건물이었습니다. 혁신을 하려면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어떻게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그때 만난 명제가 "공간이 사람을 바꾼다."였습니다. 혁신 회의를 백번 하는 것보다 혁신적 사고가 나오게 공간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법무연수원장을 지낼 때 공간에 대해 공부하고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신축 건물 설계도를 전면 수정하였습니다. 그 유산은 그대로 검찰의 DNA가 되었습니다.

4. 스스로 생각하는 경쟁력의 원천은?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새로운 것을 보면 아이들처럼 열광합니다.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리 어댑터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개념, 새로운 학설 모든 것에 가슴 뜁니다. 이것이 오늘의 저를 지탱하고 있는 힘입니다.

두 번째 마음속에서 하루에 사업체를 몇 개씩 만들고 새로운 이론을 여러 개 만들어 냅니다. 창의성이라고 이름 붙일수 있습니다. 저절로 머리에서 떠오릅니다. 딸아이가 말합니다. "아빠가 이야기한 것 중에 사업화된 것이 여러개 있어요. 최근 뜨는 뮤지컬 웨딩도 아빠가 이야기한 거잖아요."

세 번째는 어떤 현상이든 일단 들으면 짧은 시간에 구조화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설명력입니다. 아마도 월요편지를 쓰면서 스토리텔링 능력이 키워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설명이 꼭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구조화해서 설명하는 데는 큰 힘이 들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 자신이고 저를 지탱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일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것 몇 가지는 가지고 있지요. 그것이 시대를 잘 만나면 대박이 나고 성공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5. 앞선 인물에게서 받은 물적 심적 유산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가끔은 아버님에게서 유산을 받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서울대 법대에 갈 수 있고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머리를 유산으로 주셨잖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더군요. 아버님에게서는 명석한 머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에게서는 힘든 현실을 참아내는 힘을 배웠습니다. 유산하면 보이는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많은 유산이 저의 오늘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아직 질문 11개의 반도 소화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에서 끄집어 내고 싶은 불덩어리를 느낍니다. 너무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절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글은 가슴의 불덩어리를 끄집어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불덩어리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제 가슴이 타들어 갑니다. 불덩어리를 글로 끄집어내면 불덩어리를 서서히 식습니다. 독자가 그 불덩어리를 만날 때면 독자에게 따뜻한 손난로가 되어 마음의 위안이 됩니다.

오늘 그 불덩어리를 끄집어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합니다. 불덩어리가 있다는 것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여러분도 오늘 제 마음에 불덩어리가 만들어지게 만든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세요. 여러분 가슴속 불덩어리를 만나실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10.15.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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