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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번째 편지 - 유럽 배낭여행으로 훌쩍 커버린 아들 녀석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지난 6월 졸업한 아들 녀석이 한달간의 유럽 배낭 여행을 마치고 지난주 목요일 귀국하였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저희 부부가 만난 아들은 한달 전의 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지엄마가 아들녀석 정민이에게 “유렵여행은 어땠니.”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정민이는 천연스럽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엄마 제 인생에 세번의 전환점이 있었는데요. 그 첫번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미국 미시간주 그랜래핏으로 어학연수를 간 것이고요. 두번째가 캘리포니아주 오하이 밸리에 있는 대처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고요. 세번째가 이번 유럽 배낭여행이었어요.” 저는 궁금해 이렇게 되받았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저희 세사람은 저희들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했어요. 미국인 고등학교 동창인 파커, 대니얼과 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스테르담 가는 비행기와 로마에서 각자 집에 가는 비행기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예약하지 않은 채 저희들이 하고 싶은대로 여행을 다녔어요. 한달 동안 7개 국가 10개 도시를 다녔는데 어느 도시에서 가서 너무 좋으면 몇일을 지내고 다음 도시로 옮겼어요. 미술관도 가고 클럽도 가고 관광명소도 들렀어요. 식사는 식당에 가기도 했지만 파리에서는 세느 강변에 앉아 흘러가는 세느강을 바라보며 사가지고 간 음식을 꺼내 먹기도 했어요. 이동은 유레일패스로 기차로 이동하였고 잠은 유스호스텔에서 잤는데 좋았어요. 유스호스텔에서 약 50명이상의 외국 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앞으로는 어느 나라를 가도 친구가 한두 사람은 있을 거에요.

 그런데 아무도 저희 방식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사전에 숙소를 예약하여 그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데 저희에게는 그런 스케줄 자체가 없었어요. 여행중에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도 많이 만났는데 여행에 지친 모습들이었어요. 단체 관광객이다 보니 로마에서도 관광 명소에 가서 사진찍기 바빴어요. 그분들은 여행을 즐기지 못하시는 것 같았어요. 저희는 여행 자체를 즐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어요. 무척 많이 걸었는데 걸으면서 도시를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이 빌딩을 지은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지었을까? 이 가게는 어떤 사람이 운영하고 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하나하나가 다 새롭게 느껴지더라구요.”

 속사포처럼 내 품는 정민이의 여행이야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여행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아들이 아빠를 넘어서고 있구나’ 하는 대견함, ‘우리는 스무살 젊음에 이런 생각을 하였던가’ 하는 부러움, ‘그런 생각이 자만으로 흐르면 안될텐데’ 하는 부질없는 걱정 등이 교차되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차는 방배동 집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저와 아내는 정민이를 위해 저녁 시간을 비워두고 6시반경 강남역 근처에서 만났습니다.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정민이는 강남역 근처를 걷고 싶다고 하였고 저는 차를 한시간 쯤 타고가서 무엇을 하자는 다른 제안을 하였습니다. 결국 옥신각신 끝에 일단 저녁을 먹고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식당이 만원이라 아내가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 동안 저와 정민이는 인근에 있는 쥬스 가게에 가서 쥬스를 사오기로 하였습니다. 쥬스를 사러가는 길에 정민이는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저에게 강남역 근처에 있는 GT타워의 빌딩 색깔이 바뀌는 것을 가르키며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빠 저런 것을 감상하셔야지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어느 곳으로 가기만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도시에서 사람과 빌딩을 보며 걷는 것을 즐겼어요. 그러는 것이 여행 아닌가요. 제가 오늘 차를 타고 한시간 걸려 가는 것보다 강남역을 걷자고 한 것도 가족끼리 귀중한 시간 몇 시간중 두시간을 차에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 말씀드린 거에요.”

 순간 어떻게 대응을 하여야 할지 몰라 멍하였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멈추면 달릴 때 못보던 것을 볼 수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몰라서 실천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제가 굳이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은 것은 ‘멈추라’는 충고에 대해 나름대로의 반감이 있어서 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달리기만 하였습니다. 물론 때론 멈추기도 하고 쉬기도 하였지만 늘 마음 속에는 달려야 한다는 명제를 안고 살았습니다. ‘혜민 스님은 세속적인 성공이 필요없는 스님이시니까 그렇게 이야기 하시지만 한국 사회에서 멈추기만 하면 과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성공에서 멀어진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종의 청량음료 같은 것은 아닐까? 순간은 시원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달리면서도 그 속도감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마라톤을 하는 친구들에게 들으며 35킬로미터 지점이 가장 힘든 지점인데 이때 몰핀의 10배가 되는 엔돌핀이 솟아 나오고 이때의 희열감으로 나머지 7킬로미터를 더 달리고 다음번 마라톤에 참가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멈추라고 하지말고 더 뛰면서 마라톤의 35킬로 미터 지점의 희열을 맛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반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아들에게서 엄청난 도전장을 받은 것입니다.

 정민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즉답을 하지 못하고 아무말 없이 쥬스 가게까지 왕복 10여분을 다녀왔습니다. 아들이 좋아하는 쌀국수 집에서 쌀국수를 먹는 동안에도 제가 별말이 없자 낌새를 채고 아내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잠시 기운을 차리고 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빠가 네가 느끼는 여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젊은 날 그런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지. 아빠도 너처럼 느끼려고 노력하지만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더구나. 늘 무엇을 할 것인지 수첩에 적고 그것 하나하나를 지우는 재미로 살아왔지. 엄마가 휴일에는 그저 아무일 하지 말고 쉬라고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한지 오래지. 어려서 클래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 아무리 음악회를 찾아 다녀도 클래식의 전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지. 그런데 네가 두가지를 기억하면 좋겠구나. 첫째 인생을 살면서 밸런스를 유지하면 좋겠다. 천천히 걸으며 매순간을 느끼고 만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열하게 경쟁하며 달려야 하는 순간도 아름다운 시간임을 기억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너와 같이 생각하지 못한다고 열등하다거나 측은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좋겠다. 개개인은 모두 처지가 다르니까 말이다.” 정민이가 제 말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아빠, 제가 오늘 실수한 것 같아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유럽여행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정민이가 강남역을 마치 파리 걷듯이 걷고 싶다는 것을 흔쾌히 동의해주지 못하고 토론을 벌인 제가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이 너무 늦어 모두가 피곤해 하여 강남역은 결국 걷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아들에게 다가가 등을 쓰다듬어 주며 마음속의 불편함을 이런 방식으로 풀었습니다. “정민아, 아빠는 네가 대견하구나. 네가 이번 여행에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많은 것을 배웠구나. 네가 오늘 실수 한 것 없다. 네가 이번 여행에서 느낀 생각을 평생토록 잊지 말고 살거라. 결국 살아보면 인생에는 ‘현재’ 밖에 없더구나. 현재를 잘 느끼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아빠도 그 깨우침을 얻은지 얼마되지 않았으니까. 잘자거라.” “아빠 사랑해요.”

 아들과의 인생에 대한 토론은 이런 식으로 끝이 났습니다. 아들 방을 나서며 훌쩍 커버린 정민이와 더 많은 대화를 자주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3.7.22. 조근호 드림

 (방송 안내)

 4월15일부터 26주 동안 매주 월요일 10시부터 11시까지 방송되는 극동방송(AM 1188 또는 FM 106.9) ‘사랑의 뜰안’ 프로그램에 조근호 변호사의 월요편지 코너가 신설되었습니다. 그 동안 썼던 월요편지 중에서 일부를 골라 청취자 분들에게 제 육성으로 전달해 드리게 됩니다. 시간은 대략 10:40 경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나시면 들어 주세요. 새로운 감흥이 있으실 것입니다. 라디오 듣기가 불편하신 분은 스마트 폰에 극동방송 앱을 다운 받으시면 그 시간에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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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동안 쓴 월요편지를 묶어 펴낸 오늘의 행복을 오늘 알 수 있다면’(21세기 북스 출판)에 대해 여러분들이 큰 관심을 보이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세는 좋은 곳에 쓰려고 고민 중입니다. 계속 응원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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