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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번째 편지 - 한양도성 순성놀이를 아시나요.

 

9월 13일 저녁 6시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9-70. 제가 속한 아다지오라는 모임에서 보내온 모임 시간과 장소 안내문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찾아가 보니 조그만 예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입니다. 예술가의 손길이 스쳐 지나갔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상호며 그림과 조각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알고 보니 저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화동 벽화마을. 


개뿔, 배오개, 이토, 노박 등 우리말 같은데 뜻을 잘 모르는 상호가 오손도손 무리를 지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성곽 주변 마을에 대한 재생사업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쇳대 박물관이라는 명칭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쇳대 박물관이 이곳에 있고 그 박물관을 만든 최홍규 관장이 이 이화마을 재생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화 벽화마을은 젊은 예술가들의 벽화로 유명하였으나 관광객이 너무 몰려드는 바람에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쳐 벽화를 철거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개뿔 카페에서 커피 한잔 씩 마신 일행 열댓 명은 자원봉사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한양 도성 관람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서울 야경 한번 구경하시죠." 가이드의 말에 일제히 서울이 바라보이는 전망대 같은 곳에 섰습니다. 전망대라지만 그저 동네의 한 귀퉁이. 그곳에서 바라보는 서울 시가지는 그림엽서의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지저분한 모습은 저녁노을로 적당히 가리고 자신의 가장 자신 있는 부분만 마지막 햇살에 드러내며 뽐내는 서울 시가지 모습은 여전히 사랑할만한 구석이 많은 우리의 삶터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한양 도성 중 일부를 돌아보실 것입니다. 서울의 성곽은 총 18킬로미터가 넘습니다. 그중 일부는 멸실되고 꾸준히 복원한 결과 현재는 약 70% 정도 남아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도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도성에는 4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문이 있습니다. 그 네 개의 큰 문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사대문입니다. 

한번 하나하나 이름을 대어보실까요. 동쪽에는 동대문인 흥인지문이 있고 남쪽에는 남대문, 즉 숭례문이 있고, 서쪽에는 서대문이라 일컫는 돈의문이 있습니다. 이름에 특별한 한자들이 들어 있습니다. 눈치채셨나요. 유교의 중심 사상인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5가지 덕목 오상(五常)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대문 이름에 하나하나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빠져있나요. 예, 그렇습니다. 지와 신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면 지와 신은 어느 이름에 들어 있을까요."

가이드의 설명은 점점 흥미를 돋우어갑니다. "지는 원래 북문 명칭에 들어가야 하나 빠졌습니다. 북문의 원래 명칭은 숙청문이었다가 몇 년 후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는데 그 정(靖) 자가 꾀 정입니다. 북문이라 지(智)를 못 쓰고 꾀에 해당하는 정(靖) 자를 쓴 모양입니다.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보신각에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지명에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가이드의 안내로 천천히 성곽을 돌아보니 서울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간 서양문화를 공부한답시고 그리스로 로마로 돌아다닌 제가 스스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서울에 이런 유서 깊고 아름다운 성곽이 있는데 뭘 그리 찾아 헤매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번 행사를 주관한 회원이 외국인이셨습니다. 오수잔나님은 한양도성 해설을 자원봉사 하는 단체를 위해 영어해설 스크립트를 만들어 주고 계셨습니다. 외국인도 우리의 문화유산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고 있는데 하물며 이런 도성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니 성곽의 돌이 여러 가지 모양이었습니다. 아마도 여러 번 개축이 된 모양입니다. "이 성곽은 여러 번 개축이 됩니다. 태조 때 축조되고 세종, 숙종, 순조 때 개축 공사를 하였습니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 구간 훼손된 것을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축과 복원 때마다 사용한 돌의 크기가 달라 지금은 나이테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을 보니 간혹 희미하게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궁금해 물어보았더니 역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성곽을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성곽을 구간별로 나누어 각 지역 출신 일꾼들에게 축조 책임을 맡겼습니다. 여기 보이는 '홍산'이라는 글씨는 부여군 홍산면에서 온 일꾼들이 만든 구간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 지역 명칭을 남긴 것은 자신들의 공사를 기념하는 의미였나 보네요." 저의 순진한 질문에 돌아온 답은 서글픈 내용이었습니다. "구간을 공사한 일꾼들의 지역 명칭을 돌에 새긴 것은 훗날 그 구간 공사에 하자가 생기면 그 일꾼들을 불러 보수 공사할 책임을 지우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무서운 기록이지요." 일종의 공사 실명제인 셈입니다. 

성곽을 거의 다 둘러볼 때쯤 가이드가 의미 있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사실 한양의 성곽은 적의 침략에 대한 방어 용도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넓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만 잘 바치면 외침을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동대문을 통해 진격해 왔습니다. 동대문과 그 주변 성곽은 지대가 낮아 방어에 부적합하였습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갑니다. 이번에는 북쪽에서 청나라가 침공합니다. 인조는 한양을 다시 버리고 강화도로 피난 갑니다. 한국전쟁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피난 갑니다. 이것은 제 해석입니다만 대한민국 국민의 DNA에는 지도자가 국민을 버리는 데 대한 트라우마가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사가 역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DNA에 각인되어 현실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해석을 들으니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길너머로 혜화문이 보입니다. 혜화문은 한양의 4소문 중의 하나인데 1413년 풍수적 이유로 숙정문이 폐쇄되면서 북문의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날의 한양도성 답사는 여기에서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한 한양도성 답사는 특별한 명칭이 있었습니다. 한양순성놀이. 조선 시대 백성들이 한양도성을 돌면서 소원을 비는 놀이를 '순성'(巡城)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임금도 순성을 하며 백성들의 삶을 살폈다는데 한동안 그 맥이 끊어졌다가 2011년 다시 시작되어 이제는 큰 행사로 발돋움하였습니다.

금년에는 10월 13일 일주 코스로 18.6킬로미터를 돌고 반주코스는 10킬로미터만 순성한다고 합니다. 이 순성놀이의 표어가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입니다. 이날의 행사가 없었으면 [한양 도성]은 물론 [순성놀이]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가이드는 이 행사를 주관하는 서울KYC 소속이었습니다. 그의 우리 역사에 대한 열정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일행과 헤어져 차를 타기 위해 혜화동 로터리로 걸어오면서 서울 구석구석에 새겨진 우리의 역사에 대해 그간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이 역사를 복원하고 지켜나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기대가 마음에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한양도성 순성놀이 알고 계셨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9.17.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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