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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번째 편지 - 남편 여러분 혹시 집안에서 선의의 독재를 하지 않나요

          남편 여러분 혹시 집안에서 선의의 독재를 하지 않나요.


  혹시 여러분은 배우자에게 편지를 쓰시나요. 저도 거의 쓰지 않는데 정말 가끔 크게 부부싸움을 하면 반성문 비슷하게 편지를 쓰곤 합니다. 아내가 옛 문서를 정리하다가 2004년 5월 26일 제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 보여주었습니다. 아내는 당시의 저의 모습과 지금의 저의 모습이 정반대라며 낯간지러운 칭찬도 곁들였습니다. 여러분 저의 사생활이지만 여러분들의 부부관계도 비슷할 수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여보! 어제(2004.5.25) 일은 미안했소. 광주(당시 광주고검 근무)로 내려오는 비행기를 타고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아래의 결론에 도달했소. 아래 글은 내가 오늘(5.26) 아침 쓴 어제치 일기요. 여기에 내 생각이 정리되어 있으니 읽어 보기 바라오.

5.26자 일기
  집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곱씹어보게 하는 하루였다. 나는 항상 집안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에도 내가 식구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늘 그렇다.

  즉 희생이 없는 것이다. 가족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싫어해도 해주는 것. 그것은 내가 거의 해본 기억이 없다. 결국 가족에게 희생한다고 해도 나의 만족을 위해서이지 진정한 의미의 자기희생은 없는 것이다. 자기희생이 없는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사실을 늘 망각하고 아니 외면하고 살아 온 것이다.

  아내와 윤아(큰 딸), 정민이(막내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갈등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먼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혹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면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토의를 통해 상대방의 동의를 받아 결정하여야 하나 나는 늘 일방통행 식이었다.

  그것이 가족들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선의의 독재를 한 것이다. 드디어 그 독재가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아침부터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가족들을 데리고 국립박물관과 인사동을 가려 하였다. 내 생각에는 정민이에게 그것이 교육적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정민이의 반응은 ‘노’였다. 여건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민이 과외가 2시 반에 있어 그 숙제를 미리하고 가야 하는 상황.

  숙제를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내 마음은 점점 닫혀 지고 있었고. 나의 선택은 잠자는 것을 통한 일종의 반발. 자고 나니 1시 반. 이미 계획은 모두 어그러지고 아내는 1시 예배에, 정민이는 내가 싫어하는 컴퓨터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가기 싫어하는 정민이를 끌다시피 하여 버키(강아지 이름)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으나 하늘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주차장에서 버키와 달리기도 하고, 정민이와 축구도 하였다. 집에 들어와 버키를 목욕시키고 있는데 아내가 들어왔다. 목욕을 마무리 짓고 정민이 과외가 끝나기를 기다려 우리는 집을 나섰다. 퇴계로의 애견가게를 들러 강아지 구경을 하고 버키를 위한 용품도 사고 아셈 센타의 책방에 들러 정민이 영어책을 샀다.

  여기서도 작은 충돌이 있었다. 내 생각에는 정민이를 위해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중 사회분야 교과서를 사서 읽게 해주고 싶은데 정민이는 내가 볼 때 별 필요도 없는 과학 교과서를 사서 읽겠다는 것이었다. 옥신각신 끝에 아내는 정민이 편을 들었고 나의 심사는 다시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애 중심으로 교재까지 고르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아셈지하거리를 걸으면서 드디어 갈등이 폭발하였다. 정민이는 여기까지 나와서 쌀국수(나는 무척 싫어함) 타령을 하더니 급기야 집에 가서 생생면을 끓여 먹자는 것이었다. 안된다고 하였더니 양보한 것이 짜장면. 도대체 내가 어릴 때 이런 경우 내 주장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무슨 교육을 이렇게 시키고 있는지 화가나 중국집에서 아내에게 폭발하였다. 정민이를 앞에 두고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퍼붓고 주차장 가는 길에 나 먼저 앞서 걸음을 걸었다.

  모자란 놈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금방 올라 왔지만 원인이 무엇인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일기를 쓰면 생각해 보니 나의 문제는 자기희생이 부족한 것이었다. 정민이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써야겠다. 끝

  편지를 읽고 이것 내 소리를 하는구나 하고 느껴지신 남편분, 또는 이것 내 남편과 똑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신 아내분.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들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가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요. 단지 그것을 몰라주는 가족이 야속하고 답답하지요. 그러나 제가 생각을 바꾸어 행복경영 관점에서 가족을 바라보니 제가 할 일은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가족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 남편, 아빠는 이렇게 하면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되고 아내는 버릇이 나빠지며 아이들은 장래를 망치게 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되는지 한번 실험해 보세요. 제가 이렇게 1년 9개월을 살았는데 아직 저희 집은 멀쩡합니다. 오히려 그 전보다 훨씬 가족관계가 좋아졌습니다.  

  남편이자 아빠인 여러분, 사실 집안에서 우리가 왕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아내와 아이들이 한 편이 되어 우리를 흉보고 자기들끼리 쉬쉬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저도 이번에서야 말을 해 주어 알았습니다. 

  혹시 변하기 전 저의 모습과 같으신 분이 있으시면 한번 변신을 시도해 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행복해집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09.12.14.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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