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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번째 편지 - 여행은 걷기이다.

 

지난주 때늦은 여름휴가로 가족과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여행하였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번잡한 곳보다 조용한 산간지방이 좋고 짜여진 일정표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편하게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여행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정 거점은 필요하여 몇 군데 숙소를 정하고 나머지는 편하게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혼자 또는 가족과 같이 걷는 시간이 제법 있었습니다. 

첫 번째 걷기

이태리 로마, 스페인 광장 부근 21:00

비행기 노선 경유지로 로마를 택하였기에 로마에서 1박 하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로마 시내의 스페인 광장이 바라 보이는 골목길까지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그간 몇 차례 로마를 방문하여 이 길이 낯설지 않습니다. 식당을 찾으러 골목길을 돌아서니 어디선가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노랫소리를 따라 걸어가 보니 몸집이 보통 사람 두 배쯤 되는 여성과 호리호리한 남성이 듀엣으로 이태리 가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누군가는 노래를 감상하고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그 장면을 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뜻밖의 횡재입니다. 한밤 로마의 뒷골목에서 멋진 노랫소리를 듣다니. 이리저리 걷다가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녀가 우리 자리 부근으로 다가와 노래를 시작하였습니다. 찬스다 싶어 핸드폰으로 노래 한 곡을 동영상 촬영하였더니 노래가 끝나고 다가와 돈을 달라네요. 그러면 그렇지. 유로가 없어 달러를 내놓았더니 불쾌한 표정을 짓네요. 역시 로마네요. 옆자리에 앉은 관광객이 가방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래 이곳은 소매치기 집시 천국이지. 이제서야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두 번째 걷기

독일 휘센, 린더호프 성 부근 15:00

자유여행이지만 그래도 필수 과목은 있습니다. 독일 뮌헨 공항에서 독일 휘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가는 길에 린더호프 성을 들렀습니다. 두 성 모두 바이에른의 비운의 왕 루드비히 2세가 지은 것입니다. 건축에 미쳐 결혼도 하지 않고 살다가 국고를 탕진한 죄로 폐위된 지 사흘 만에 변사체로 발견된 왕입니다. 그러나 미친 그는 전 인류에게 큰 선물을 남기고 갔습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디즈니랜드의 로고로 유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이슈반슈타인 성보다 린더호프 성이 더 마음에 듭니다. 1993년 스페인에서 연수할 때 방문하였지만 너무 늦게 도착하여 내부는 구경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본 기억이 있어 이번 여행에 꼭 방문할 곳으로 정해 둔 곳입니다. 그러나 역시 성을 둘러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한 시간 이상 걷다 보니 가족들이 모두 힘든 모양입니다. 관람을 마치고 가게에 들러 커피를 마시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관광객들도 힘든 표정입니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한 쌍의 남녀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자는 커피를 사서 들고 있고 남자는 소모품 진열대에서 커피 뚜껑을 가지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오페라 가수 처럼 노래를 하였습니다. "Cover is coming!" 우리말로 하면 "뚜껑이 오고 있어요." 입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빙긋이 웃습니다. 저는 절대로 하지 못할 모습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옆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 그는 여자에게 가게 문을 열어 주면서 또 노래를 합니다. "Lady, first!" 그는 인생이 오페라나 뮤지컬인 모양입니다. 



세 번째 걷기

오스트리아 엥알름, 목장 부근 06:00

시차 때문에 아침 일찍 잠이 깼습니다. 밖이 밝아오자 바로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나섰습니다. 고도 1270미터 지역이라 제법 쌀쌀합니다. 사방이 알프스산맥으로 둘러싸인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입니다. 한국인은 거의 오지 않는다는 이곳. 가족 여행지로 엥알름을 소개한 동아일보 여행 전문기자 조성하 국장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이곳을 방문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조 국장은 마치 우리 가족을 위해서인 양 지난 8월 18일 엥알름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엥알름 계곡은 찌들어 빠진 세상과 완벽히 다른 세상이었다. 천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공기는 상큼했고 풍광은 신비로웠다. 인기척마저 드물어 신중 초원에서 들리나니 오직 풀 뜯는 소 목에 걸린 방울 소리뿐이었다. 하이킹객도 간혹 한 두명 보일 정도. 초원엔 간간이 나무가 서 있는데 그게 유럽 단풍나무다. 수백 년생 아름드리도 있고 그 옆에 어린나무도 있다."

아침 산책에 소 떼를 만났습니다. 백여 마리가 우리에서 나와 목초지로 향합니다.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조 국장이 소개한 단풍나무 숲 초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안개가 나지막이 띠처럼 단풍나무를 휘감고 있고 그 사이사이를 워낭소리를 내며 각종 색깔과 무늬의 젖소들이 평화롭게 노닐며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조 국장이 천국이라고 할 밖에요. 저는 혼자 보기 아까워 호텔로 달려갔습니다. 가족들을 데리고 오면서도 연신 안개가 걷히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안개는 가족들을 위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걷기

오스트리아 제펠트, 호텔 부근 04:30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입니다. 아침 6시 이곳을 떠나 뮌헨공항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새벽 4시 반 무작정 호텔 방을 나섰습니다. 5층 옥상에 올라가니 제펠트(Seefeld)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한밤중이라 흐릿한 불빛만 멀리서 보일 뿐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별들이 쏟아집니다. 핸드폰으로 Lydia Gray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를 듣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개인적으로 Elton John의 원곡보다 이 노래가 더 좋습니다.

마을을 걷고 싶은 충동에 옥상에서 내려와 가로등 불빛만 드문드문 있는 길을 걸어 시내 중심지로 향합니다. 시내 중심지라 해도 한가한 곳입니다. 새벽 5시 혼자 캄캄한 낯선 길을 걷는 것이 무슨 청승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둠이 이리 포근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대도시라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작은 시골 마을의 아름다운 길을 혼자 느릿느릿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저 걷기만 하는 경험을 과연 해 본 적이 있는가. 기억을 더듬어도 쉽사리 찾을 수 없습니다. 특히 5시 새벽은 아마도 제 인생에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길을 걸으며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디며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저도 왜 여행의 마지막 날 새벽에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걷는다]는 사실입니다. 여행의 본질은 걷기입니다. 그래서 여행을 발로 하는 독서라고도 하지요. 그 말의 본질도 걸어서 경험하는 지식이라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여러 가지 형태의 걷기를 하였습니다. 자유로운 걷기가 많은 여행, 그런 여행이 기억에 많이 남는 여행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너무 좋았습니다. 가족들도 제 생각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금년 여름 여러분의 여행은 어떠셨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9.12. 조근호 드림

여행 때문에 월요편지가 수요편지가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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