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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번째 편지 - 195. 저에겐 여전히 액세서리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

 

저에겐 여전히 악세서리일 수 밖에 없는 아이들 

 며칠 전 딸아이가 저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좀처럼 서로간에 전화가 없는 사이인지라 의아하였습니다. “아빠 조수미가 불렀던 나가거든 이라는 노래를 부를 가수를 위해 무대를 디자인 하고 있는데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초안을 보내 드릴테니 보고 의견주세요.” 대기업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무대디자이너로 입사하여 1년반째 근무하고 있는 아직은 신입사원인 딸아이가 어느 가수의 무대를 디자인하다가 저에게 SOS를 친 것입니다. 저는 당혹하였습니다. 진짜 얘가 나의 아니디어가 필요해 연락을 한 것일까? 아니면 제가 딸아이와 서먹서먹하게 지내는 것이 늘 안타까워 하는 아내가 딸아이를 시켜 의도적으로 전화한 것은 아닐까? 딸아이와의 전화 한통화에도 이런 분석을 하는 저는 그다지 좋은 아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메일로 보낸 온 초안을 보고 저는 어느 정도 의견을 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말 냉정하게 코멘트를 하여야 하나. 아니면 무조건 잘 만들었다고 립서비스를 하고 형삭적으로 한두마디 하여야 하나.’ 드라마 명성황후의 주제가인 나가거든의 무대는 당연히 비장함이 있어야 하고 시해당한 국모에 대한 통한과 애잔함이 표현되어야 하는데 딸아이가 보내온 초안에 사용된 꽃은 뜻밖에도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었습니다. 저는 딸아이와 전화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이야기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래도 꽃은 바꾸는 것이 좋겠어. 무궁화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표현하는 꽃이면 좋겠어. 그리고 부채를 이용한 것은 좋은데 노래 배경이 궁중인데 그에 대한 상징성이 좀 부족한 것 같으니 궁궐 처마 같은 것을 상징화하여 가미하면 어떨까?” 무대디자인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저는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저도 모르게 의견 교환에 몰입하였고 딸아이는 그런 저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해 주었습니다. 저는 마치 사무실의 어느 새내기 변호사와 토론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전화를 받고 이 전화가 어떤 의미일까 고민하던 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딸아이와 한참을 재미있게 토론을 하였습니다. 토론 끝에 딸아이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역시 아빠와 이야기 하니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랐어요. 아빠 고마워요.” 저는 멍하였습니다.

 저와 딸아이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딸아이가 저에게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제가 딸아이에게 아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악세서리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너무도 잘아는 저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딸아이가 여전히 악세서리였습니다. 제가 딸아이 윤아에게 아쉬움이 있는 것은 이렇다 하게 잘했다고 인정해 줄만한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 대해 아내는 늘 불만입니다. ‘윤아가 천사처럼 착하고 예쁜데 더 뭘 바라냐.’고 답답해 합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250대1의 경쟁률을 회사를 입사한 것은 물론 박수를 칠 만한 것이었지만 그후 회사 생활을 보면 늘 실수투성이었고 상사에게 걸핏하면 야단맞아 찔찔짜고 맨날 회사를 다닌다 못다닌다로 지 엄마와 상담하니 지켜보는 저로서는 속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라고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러니 관계가 좋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던 차에 저에게 전화를 걸어 디자인을 상의한 것입니다. 디자인 상의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금요일 아내가 밤에 엠넷 방송에서 하는 보이스 오브 코리아 파이널을 보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얘들 프로 같은데 무엇하러 그런 것을 보러 가냐고 묻자 아내 말이 윤아가 무대디자인을 전부 만들었으니 보러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얼마전 윤아가 상의해온 나가거든의 무대디자인이 떠올랐습니다. ‘아하, 그게 이 보이스 오브 코리아 파이널 무대중 하나였구나.’

 금요일 밤 10시반 아내와 저는 일산에 있는 고양체육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약 7000석의 객석을 반 짤라 무대를 만들었는데 객석이 3층까지 꽉찬 것을 보면 족히 2000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찬 것 같았습니다. 11시부터 생방송으로 시작되는 관계로 모든 무대 스텝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무대에서는 사전 MC가 관객들을 상대로 흥을 돋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11시 생방송 보이스 오브 코리아 시즌 2가 시작되었습니다. 보이스 오브 코리아는 금년 2월22일부터 가수 신승훈을 비롯한 4명의 코치가 각 10여명의 가수지망생을 데리고 훈련을 시켜 노래 경연을 펼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날로 최종 경합자 4명이 각 두 곡씩 불러 시청자 투표로 우승자를 가리는 날입니다. 저는 솔직히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윤아가 만든 8개의 무대가 잘 만들어졌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각 후보가 노래를 부르기 전에 그가 부르는 노래에 맞는 무대를 세팅하고 그 노래가 끝나고 TV 화면에서 이미 녹화해둔 다음 후보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2분 동안 먼저 번 무대를 빼내고 다음 곡을 위한 무대를 설치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니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생방송 사고가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자가 나와 멘트를 하고 녹화 테이프가 돌아가는 순간 첫번째 무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와 아내는 윤아가 어디에 있나 고개를 쭉 빼들고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윤아는 무대 중앙에서 스텝들을 지시하며 무대 세팅 작업을 진두지휘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맨날 상사에게 야단맞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던 아이가 마치 10년 경력자처럼 무대 이리저리를 다니면 작업을 지시하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무대 전체를 점검하여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다시 위치를 잡고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릅니다. ‘다 컸구나. 이제 어였하게 제 역할을 하고 살고 있구나.’ 그간 딸아이를 못마땅해 하였던 제가 부끄러워지고 못난 아버지였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8개의 무대가 교체될 때 마다 마치 제가 딸아이인 것처럼 혹시라도 실수가 있을까 마음 졸였습니다. 매 무대가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딸아이가 그토록 신경을 쓰던 나가거든의 무대가 특별히 돗보였고 그래서 그랬는지 그 노래를 부른 후보가 최종 우승을 차지 하였습니다. 윤아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 윤아를 바라보니 한뼘은 더 커보였고 대견스러워 보였습니다. 윤아에게 네가 만드는 무대 보고 싶으니 또 초대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자유로를 타고 오며 혼자 상념이 잠겼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악세서리여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저는 여전히 자식을 악세서리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악세서리가 빛이 난 날입니다. 이 편지를 쓴 이유도 은근히 그 악세서리를 자랑하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다 이런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자신이 출세한 것 보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합격한 것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주위에서 부러워하고 축하합니다. 세상사가 그런 것을 보면 저도 그리 별난 아빠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악세서리가 기분 좋은 선물의 역할을 하였지만 또 언젠가 그 악세서리 때문에 속상해 하고 섭섭해 할 날이 올 것입니다. 다만 그 기복이 너무 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3.6.3. 조근호 드림

 (방송 안내)

 4월15일부터 26주 동안 매주 월요일 10시부터 11시까지 방송되는 극동방송(AM 1188 또는 FM 106.9) ‘사랑의 뜰안’ 프로그램에 조근호 변호사의 월요편지 코너가 신설되었습니다. 그 동안 썼던 월요편지 중에서 일부를 골라 청취자 분들에게 제 육성으로 전달해 드리게 됩니다. 시간은 대략 10:20-40 사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나시면 들어 주세요. 새로운 감흥이 있으실 것입니다. 라디오 듣기가 불편하신 분은 스마트 폰에 극동방송 앱을 다운 받으시면 그 시간에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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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동안 쓴 월요편지를 묶어 펴낸 오늘의 행복을 오늘 알 수 있다면’(21세기 북스 출판)에 대해 여러분들이 큰 관심을 보이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세는 좋은 곳에 쓰려고 고민 중입니다. 계속 응원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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