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532번째 편지 -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와 [이번만은 달라] 학파

 

세상에는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와 [이번만은 달라] 학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평생을 [이번만은 달라] 학파의 추종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저는 어느새 [역사는 반복한다]는 학파로 개종을 하고 말았더군요.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와 [이번만은 달라] 학파의 입장을 식당에서 밥 짓는 일을 통해 설명해 볼까 합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다 보면 익숙해지는 일이 생깁니다. 밥 하나 짓는 일도 처음 하면 어설프지만 매일매일 하다 보면 실력이 늡니다. 누가 식당 주방에 들어가 10년간 밥을 지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쌓입니다. 그런데 그 노하우가 그의 족쇄가 됩니다. 다른 노하우를 기웃거릴 필요가 없기에 더 이상 변화가 없습니다. 손님들은 그의 밥맛에 열광합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는 밥 짓는 일에 노회 해진 것입니다. 노회가 무슨 뜻인가요. '경험이 많고 교활하다'는 뜻입니다. 밥을 오래 지었으니 경험이 많아진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활하다니. 교활하다는 것은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입니다. 다시 간사하다를 보겠습니다. 간사하다는 '자기 이익을 위해 나쁜 꾀를 부리는 등 마음이 바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일을 같은 방법으로 오래 하다 보면 사람은 꾀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늘 바른 것이 아니어서 그 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곤 하지요. 결국 밥 짓는 일에 초심을 다 하지 않고 꾀를 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세 번 씻어 돌멩이를 골라내야 하는데 두 번만 씻는 잔꾀를 부립니다. 그래도 별 탈이 없자 이번에는 한 번 씻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밥을 짓는다는 외양은 같지만 그 일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구체적인 밥 짓는 일의 질은 천양지차가 됩니다. 그러나 간사함이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을 때는 여전히 그가 한 일은 경험의 축적이어서 세련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꾀가 점점 늘면 밥의 양마저 속입니다. 그래야 이익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익은 나쁜 꾀와 결합하여 점점 대담해집니다. 나쁜 꾀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자신의 도덕적 힘을 마비시키고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가 자기 절제에 실패하면 이런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그의 밥 짓는 일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그 문제를 지적하고 나섭니다. 밥 짓는 일에 섞여 있는 나쁜 꾀를 지적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10년간 밥을 지은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가진 노하우로 상대의 지적을 무시합니다. 이때 자신의 [나쁜 꾀]를 직시하고 이를 수정하는 개인이나 조직은 다시 살아남게 되나 [나쁜 꾀]가 주는 이익에 탐닉하는 사람은 결국 파멸되게 됩니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의 본질은 세련된 노회함입니다.

그러면 이에 맞서는 [이번만은 달라] 학파의 추종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번만은 달라] 학파는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의 모순에서 출발합니다.

사람 중에는 기질상 남의 잘못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타입이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인생을 보면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혈기가 넘치는 젊은 시절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제 젊은 검사 시절은 늘 이랬습니다. 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아이디어가 넘쳤습니다. 제가 검찰을 바꾸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 타입은 대부분 민감한 기질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밥 짓는 달인이 교활해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처음에는 어필합니다. 왜 쌀을 세 번 씻지 않고 두 번 씻냐고. 왜 쌀의 양을 속이냐고. 지적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증거를 들이대고 이론을 정립합니다. 이론은 점점 구체화되고 일정한 체계를 이루게 됩니다. 이 이론의 축적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공감을 드러냅니다. 결국에는 식당의 고객들은 힘으로 밥 짓는 달인을 주방에서 몰아내게 됩니다.

이것을 역사는 혁명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조직이나 개인의 삶에서는 혁신이라고 합니다. 저는 검찰에서 3년간 혁신추진단장을 맡아 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는 검찰의 모든 일을 다 바꾸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밥을 지어 본 경험이 없고 책을 통해 이론으로만 접한 [이번만은 달라] 학파 추종자가 이제 밥을 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공부한 새로운 방법은 신선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왠지 어설픕니다. 밥맛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예전 밥맛에 길든 식당의 손님들은 아우성칩니다. 그래도 새 밥의 신참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밥맛은 비록 예전 같지 않지만 자신들은 적어도 밥맛의 달인처럼 나쁜 꾀를 부리지는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애써 밥맛의 달인이 했던 방법은 무시합니다. 밥맛의 달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도덕성이지 그의 밥 짓는 솜씨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 밥의 신참은 새로운 밥 짓는 기술이 더 좋다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책 속의 기술일 뿐 10년간 주방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기술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밥맛은 여전히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방을 공개하고 손님에게 친절하게 합니다. 소통과 친절.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밥 짓는 달인의 권위와 오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식당 손님들은 비록 밥맛이 예전만 못해도 소통과 친절로 참아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사람의 본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나쁜 꾀가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소통과 친절에는 고도의 인격적 경지가 필요하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결국 그들 사이에 균열이 생겨 일부 이탈자가 생깁니다. 도덕성으로 버텨오던 신참들의 도덕성이 추락하자, 식당의 손님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상황이 또 초래됩니다.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번만은 달라] 학파의 본질은 '신선한 어설픔'입니다.

저는 검찰에서 혁신을 추진하면서 이 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만은 달라] 학파의 선도자로 살면서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의 집단 저항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도 나름의 의미가 있고 [이번만은 달라] 학파도 시대적 소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어느 학파를 원하느냐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지겠지요.

요즘 아이들이 저의 양육방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가 [이번만은 달라] 학파의 도전을 받고 있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검찰에서 혁신을 추진하던 상황과 정반대 상황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의 '세련된 노회함'으로 [이번만은 달라] 학파의 '신선한 어설픔'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노회함'을 벗어버릴 때 아이들도 '어설픔'의 한계를 인식하게 될 테니까요.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역사는 반복한다] 학파를 따르는 저의 '세련됨'과 [이번만은 달라] 학파를 따르는 아이들의 '신선함'이 조화를 이루는 가정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신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9.3. 조근호 드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