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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번째 편지 - 초월번역을 아시나요?

 

지난 7월 29일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공연을 가족과 함께 보았습니다. 잘 아는 내용인데도 여전히 감동이 있었습니다. 가수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역시 이 뮤지컬은 스칼렛 오하라가 자신 가문의 땅 타라로 돌아가 명대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

그런데 이 대사의 원문은 무엇이었을까요. 찾아보니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였습니다. 직역하면 "어쨌든, 내일은 새로운 날일 거야." 정도일 것입니다. 영어 원문보다 번역이 더 멋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의 한 대목 번역문이 생각났습니다. [사랑을 지키는 법]에 인용된 하즈라트 이나야트 칸(Hazrat Inayat Khan)의 명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역문은 이렇습니다.

"신은 마음이 열릴 때까지 계속해서 슬픔에 젖게 한다." 이에 대한 원문은 "God breaks the heart again and again and again until it stays open."입니다. 직역하면 "신은 마음이 열릴 때까지 마음을 계속해서 부순다"일 것입니다. 'God breaks the heart'를 '슬픔에 젖게 한다'로 번역한 것은 번역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런 번역을 초월번역이라고 하더군요. 원문의 느낌과 어감을 원문의 직역보다 더 효과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번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월번역이라는 개념을 알고 과연 우리가 알던 명문장 중에 어떤 것들이 초월번역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졌더니 꽤 여러 가지 문장이 초월번역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농구는 신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명문장이 있습니다. 그 문장의 원문은 "Everybody was saying we couldn't win because of our size. But it's not about the size on paper, it's about the size of your heart."로,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다들 우리가 작아서 이길 수 없었다고들 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서류상의 크기(신장)가 아니라 마음(심장)의 크기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밋밋한 문장을 신장과 심장을 대비시켜 명문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명문장은 183센티미터의 단신으로 미국 프로농구를 평정했던 앨런 아이버슨이 은퇴 소감으로 한 말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위트 있는 자작 묘비명으로 잘 알려진 문장입니다.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며, 올바른 해석은 "오래 살다 보면 언젠가 이런 일(죽음)이 생길 줄 알고 있었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물쭈물'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들의 우유부단함을 꼬집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의 명문입니다. 햄릿의 독백으로 유명하지요. 원문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입니다. 직역하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원문은 삶을 앞에 두었는데 번역문에서는 죽음을 앞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명문이 된 것 같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하면 맛이 확 떨어집니다.

초월번역에 재미를 붙여 인터넷을 이리저리 찾다 보니 초월번역한 외화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과 영혼]입니다. 19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 이 영화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귀신 영화를 이리도 아름답게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전의 히트는 번역된 영화 제목 [사랑과 영혼] 덕분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원제는 Ghost, 귀신이었거든요. [귀신]이라고 영화 제목을 붙였으면 우리 가슴에 그리 오래도록 남았을까요.

2013년 공전의 히트를 친 만화영화 [겨울왕국]도 대표적인 초월번역의 예입니다. 원제는 Frozen, 냉동이었습니다. 누가 번역해도 제목으로 냉동이라고 번역하지는 않았겠지만 겨울왕국으로 번역한 솜씨는 누가 보아도 초특급입니다. 왕국이라는 개념이 생기자 공주가 떠오르고 무슨 비밀도 연상됩니다. 천만 관객은 제목 덕을 좀 보지 않았을까요.

[미녀 삼총사]라는 제가 아주 좋아했던 오래된 미드가 있습니다. 원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찾다 보니 원제는 'Charlie's Angels'이었습니다. 백만장자 찰스 타운젠드가 설립한 탐정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 탐정 세 명의 이야기였죠. [찰리의 천사들]이라고 하면 저는 전혀 다른 미드로 이해 하였을 것 같습니다.

초월번역이 반드시 신기 어린 번역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오역이 초월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실수가 빛나는 한 수가 된 경우이지요.

[가을의 전설]이라는 브래드 피트가 나온 영화가 있었습니다. 원제는 Legends of the Fall입니다. 언뜻 보면 잘 번역한 것 같습니다. Fall이 가을이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Fall은 가을이 아니라 몰락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몰락의 전설]입니다. 그러나 [몰락의 전설]이라고 번역하였으면 이 영화가 그리 서정적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초월번역을 더듬어 보면서 어떤 문화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수많은 오역과 초월번역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초월번역이 많으면 좋겠지만 오역이 많으면 다른 문화를 오인하게 되어 전혀 다른 의미로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일본 사람 니시 아마네입니다. 1829년부터 1897년까지 살았던 일본의 계몽가이자 교육자입니다. Philosophy는 1839년 일본인 와타나베 카잔이 물리학(物理學)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입니다.

1861년 니시 아마네가 희철학(希哲學)이라고 번역합니다. 영어 원문 그대로 밝음(哲)을 구(希)하는 학문,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어를 만들어 냅니다. 1874년 니시 아마네는 (希)를 제거하고 철학이라고 번역합니다.

Philosophy를 철학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일까요 초월번역일까요. 개인적으로는 희철학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더운 여름날 밖에 나가기 싫어 인터넷을 뒤지고 과거에 공부한 것을 되새김질 하다 보니 초월번역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인생도 원문보다 더 낫게 초월번역 되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8.14.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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