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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번째 편지 - 땜빵 커밍아웃

 

골프를 치다보면 이런 일이 가끔 발생합니다. 골프는 4명이 치는 운동이라 미리 약속을 잡는데 골프 약속일을 며칠 앞두고 한 친구가 연락해서 그날 일이 생겨 못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명을 충원하여야 할 긴급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소위 [땜빵]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골머리를 앓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 골프인데 금요일 오전 약속 취소 전화가 온 것입니다. 사실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뜻에서 본인 사망 이외에는 골프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기도 하지만 세상살이는 꼭 격언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전화를 받고 누구를 초대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일요일 골프인데 금요일에 연락하면 누구나 자신이 땜빵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를 뭐로 보고 땜빵으로 오라는 거야. 아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한이 있어도 안 간다 안가." 이런 반응을 보일까 봐 쉽게 연락을 하지 못합니다. 특히 사회적 직함이 꽤 있는 분에게는 감히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지요.

잘못 연락했다가 인간관계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친한 친구라 해도 오랜만에 연락해서 골프 가자고 하면 섭섭해할까 봐 쉽게 연락하지 못합니다. 일행들에게도 SOS를 치고 가장 편한 친구에게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한자리를 채우거나 그것도 잘 안되면 어쩔 수 없이 세 명이 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분들 골프치는 것을 보면 인터넷으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 골프 치기도 하고 한자리 비면 인터넷에 공지하여 바로 땜빵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부럽기도 합니다.

모임을 많이 주관하는 제 지인분은 이런 때를 대비하여 땜빵 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프 좋아하는 몇몇 유명인에게 가끔 땜빵 전화를 할 테니 편하게 응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하면 땜빵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인간관계를 잘못 만든 탓일지도 모릅니다. 파산해서 돈을 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고를 쳐서 숨겨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휴일에 시간 있으면 골프 같이 치자는 것인데 이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다른 무슨 일을 부탁할 수 있을까요.

우리네 인간관계가 이처럼 형식적입니다. 체면을 따져야 하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바람에 그깟 골프 땜빵 하나 하기가 무슨 회사의 인재 채용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어느 분이 어느 목요일 아침 날씨가 좋아 주말에 골프를 치고 싶기에 어렵사리 토요일 일요일 골프 부킹을 잡고 누구에게 연락하여 골프를 하자고 할까 고민하였답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땜빵은 아니지만 연락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땜빵이라고 여길 상황이었지요.

고민하다가 전직 장관 세 분에게 토요일과 일요일 골프 부킹이 있는데 하나를 골라 같이 하자고 연락하였더니 세분 모두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하면 안 되겠냐고 답을 해와 같은 분들과 이틀을 쳤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듣기에 따라서는 퇴직한 분들이니까 시간이 많아 승낙을 하셨겠거니 할 수 있지만 퇴직한 제 입장에서 보아도 오히려 자존심 때문에 약속이 없어도 응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분들은 그런 허례허식을 벗어 버리니 기분 좋은 주말 이틀이 된 것이지요.

사실 주말에 약속 없이 집에서 지내는 분들이 왜 없을까요. 속으로는 누가 골프 안 불러 주나 하다가도 막상 하루 이틀 전에 연락이 오면 그 알량한 자존심이 "좋아요"를 답하지 못하게 가로막지요.

지난주 점심에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느 회장님은 임원들에게 친구들의 땜빵 순위 1, 2번에 오르게 인간관계를 잘 맺으라고 강조한답니다. 듣고 보니 참 깊이가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땜빵 순위 1, 2번. 저는 과연 땜빵 순위 몇 번일까요. 아마도 하위권일 것입니다.

친구들이 무슨 일을 하다가 자리가 하나 비었을 때 부담 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 인간관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사람입니다. 언젠가 월요편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타입은 문제가 있을 때 찾아가 상담을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둘째 타입은 문제가 있을 때 불러내 술 한잔 같이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둘째 타입을 땜빵 순위 1, 2번에 꼽을 것입니다.

결국 땜빵으로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친구들의 땜빵 순위에서 하위에 속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일 것입니다. 결국 땜빵은 인간관계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주제입니다. 인간관계가 편안하고 넉넉한 사람은 땜빵으로 큰 고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친구에게 주말에 집에만 있지 않고 푸른 잔디를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설레며 전화를 할 것입니다. 그가 사정이 있어 그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은 그의 문제이지 저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인간관계를 만들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은 장벽을 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만든 것입니다. "그분은 바쁜 분이니 주말에 빈 시간이 없을 거야." "그 친구는 퇴직해서 땜빵으로 부르면 섭섭해할 거야." 이런저런 장벽이 제가 전화하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사실 용기를 내어 땜빵 연락을 한 경우, 상대가 선약이 있다고 할 경우 그것이 진짜 선약이 있는지 아니면 기분 나빠 거절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땜빵 연락을 거절 당하면 다음에는 땜빵 연락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니 한두 번 땜빵 연락을 하다간 지쳐 다음에는 땜빵 상황이 오면 그냥 세 명이 치는 쪽을 선택하고 말지요.

이런 대화 중에 국영기업체 대표도 하시고 대학 총장도 하신 어느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평소 친구들에게 언제든지 골프 땜빵으로 불러 달라고 공표해 놓았습니다. 하루 이틀 전이 아닌 세 시간 전에만 연락해주면 골프장에 도착할 수 있으니 아무 부담 없이 연락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위 분들이 잊어버리지 않게 그런 이야기를 늘 입버릇처럼 합니다. 저는 땜빵으로 갔다가 홀인원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선배의 훌륭한 인품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땜빵으로 불려 다닐 분은 아닌데 자신의 포지션을 그렇게 편하게 정하신 것입니다. 소위 땜빵을 커밍아웃하였다고나 할까요. 땜빵이 골프에만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자리에 땜빵은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땜빵을 구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그 선배에게 가장 먼저 연락할 것입니다.

[땜빵 커밍아웃] 하나로 인간관계가 이렇게 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참 신기했습니다. [땜빵 커밍아웃]은 두 가지 요소를 지닌 것 같습니다. "첫째 언제든지 땜빵 상황이 오면 주저하지 마시고 연락해주세요. 저는 땜빵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둘째 혹시 제가 선약이 있어 땜빵에 응하지 못하더라도 기분 나빠 거절한 것이 아니라 진짜 선약이 있어 그런 것이니 땜빵 명단에서 삭제하지 말아 주세요."

여러분은 땜빵으로 누구를 부르기 편하신 것요. 여러분은 친구들의 땜빵 명단에 상위 순번이신가요. 저는 둘 다 반대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월요편지의 힘을 빌어 [땜빵 커밍아웃]을 하렵니다.

혹시 골프 자리가 하나 비면 저에게도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기쁜 마음으로 그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선약이 있다고 하면 진짜 선약이 있는 것이니 다음에 또 연락해 주세요. 이것도 제 Attachment의 하나입니다.

(Attachment가 궁금하시면 524번째 월요편지를 참고해 주세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7.30.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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