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02번째 편지 - [평범한 하루]가 [특별한 하루]로 바뀐 날



침대에서 눈을 뜬 저는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잠시 생각했습니다. 제주도에서의 크리스마스 가족여행 마지막 날인 12월 26일 아침 7시.

코로나19와 오미크론 때문에 전국이 초긴장 상태인데 무슨 여행이냐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한동안 미국을 가게 되는 아들 녀석과 가족들이 함께 나눌 추억의 시간이 필요해 제주여행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미술관 3곳을 관람하는 그저 <평범한 하루>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함은 창문 커튼을 여는 순간 깨져 버렸습니다. 밤사이 내린 하얀 눈이 창밖 숲속에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거실로 나가 커튼이란 커튼은 다 열어젖히자 눈밭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고 분위기를 잡아 봅니다. <휘게>가 연상되는 상황입니다. 12월 눈이 많이 내려 추운 날 밤, 방안에 촛불을 켜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는 덴마크 사람들이 느끼는 그 휘게 Hygge입니다.

11시 40분 눈길을 운전할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휙휙 돕니다. 눈발이 굵어집니다. 20여 분을 달렸을까요. 산길로 접어듭니다. 이곳은 설국, 그 자체입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멈춰 섰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이 떠오릅니다. 모두가 멈춰버리고 제 차만 움직이는 듯합니다. "윤아야, 사진 좀 찍어 봐라. 너무 멋있다. 제주에서 만난 설경. 정말 우리는 운이 좋은가 봐."

딸아이가 슬로 모션으로 찍은 동영상 속에서는 초속 50센티미터로 내리는 눈들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벚꽃이 되어 천천히 바람에 흩날립니다. 물속에서 눈이 내리는 모습 같습니다.

이 속도라면 12시 반으로 예정한 본태 박물관에 가는 일정은 무리입니다. 가족들 사이에 행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밥을 먼저 먹을 것인지, 이중섭 미술관이나 이왈종 미술관을 갈 것인지 토론하였습니다.

결론은 1시 반 관람 예약이 만료된 이중섭 미술관에 가서 사정해 보기로 했습니다. 1시 10분 이중섭 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사정사정 끝에 관람을 허락받았습니다. 시간이 되어 입장객들이 줄을 섰습니다.

안내인이 설명합니다. "이곳에는 이중섭의 그 유명한 황소는 없습니다." 몇 번을 강조합니다. 참 희한한 설명입니다. 그래도 이중섭입니다. 그러나 역시 황소가 없는 이중섭 미술관은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시인 구상의 설명에는 힘이 있습니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 남겼다. (중략)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곳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글을 보고 그림을 보니 달리 보입니다.

20여 분 관람한 가족들은 시간이 남으니 이왈종 미술관도 가자고 합니다. 점심 예약을 2시 반으로 늦추고 근처에 있는 이왈종 미술관에 들렀습니다. 제주에서 중도(中道) 생활을 즐기며 작품 활동을 해온 이왈종의 작품은 모두 밝습니다. 딸아이는 너무 좋아합니다.

"행복과 불행 모두가 다 마음에서 비롯됨을 그 누구나 알지만 말처럼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마음이 내재하는 한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흰머리로 덮여가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행복과 불행을 꽃과 새, 물고기, TV, 자동차, 동백꽃, 노루, 골프 등으로 표현하며 나는 오늘도 그림 속으로 빠지고 싶다."

이왈종 화백이 직접 쓴 "제주 생활의 중도와 연기" 글 일부입니다.

2시 40분 중문 조림식당에서 갈치조림으로 4명이 밥 일곱 그릇을 먹었습니다. 다음은 오늘의 하이라이트 본태 박물관입니다. 2012년 문을 연 이 박물관을 10년 다 돼서 왔다는 사실이 저를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전통공예, 불교미술, 전통 상례문화 등 <옛 작품>과, 현대미술, 그중에서도 특히 쿠사마 야요이와 제임스 터넬의 <요즘 작품>이 한데 어우러진 본태 박물관의 작품은 수집가의 안목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제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제2 전시관 2층의 한국 모시 조각보를 형상화한 <명상의 방>이었습니다. 텅 빈 한옥 방의 정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은 널찍한 방석이 저에게 올라오라고 손짓하는 듯합니다. 이 방은 조선조 선비 문화에 대한 안도 타다오 식 재해석입니다. 

 


박물관을 나서니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쌓인 눈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넓은 광장으로 나서기 위해 계단을 내려서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길인 줄 알았는데 발이 푹 빠지며 무릎까지 들어갑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광장이 아니라 얼음이 언 인공연못입니다.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차까지 달려가는 동안 신발과 바지가 얼어붙습니다. 연못이 깊었으면 죽을 뻔하였습니다. 익사가 아니라 동사했을 것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이제 <평범한 하루>가 <특별한 하루>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제주시로 향했습니다. 예약한 흑돼지 고기로 저녁을 먹고 부랴부랴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 비행기가 뜰지 걱정됩니다. 가족들과 짐을 공항에 내리고 렌터카를 반납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반납 장소에 아무도 없습니다. 시각은 8시 40분, 비행기는 9시 15분 발. 마음은 급해지는데 잠시 후 당직자가 느릿느릿 걸어옵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셔틀버스가 언제 오는지 문의하니 공항에서 9시 45분에 출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오면 10시. 큰일입니다.

밤중인데다 눈까지 많이 내려 이 한적한 곳에 택시가 올리도 만무하고, 저는 하는 수없이 그 당직자에게 공항까지 데려다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다행히 그가 승낙하여 8시 50분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기다리던 가족들을 만나 서둘러 탑승 수속을 밟고 탑승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탑승장 안은 눈 때문에 연발한 비행기 승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우리 비행기는 어찌 될까 궁금해집니다.

이리저리 상황을 알아보니 모든 비행기가 평균 2시간 연발입니다. 그래도 떠나기만 하면 다행입니다. 9시 15분이 지나자 9시 45분으로 연기되었다는 안내 문자가 들어옵니다. 그러나 카운터에 물어보니 아직 서울에서 비행기가 도착하지 않았답니다.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9시 58분 항공사에서 문자가 들어왔습니다. "결항되었습니다." 걱정하던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가족들은 나누어 내일 비행기와 오늘 숙소를 예약하였습니다. 30여 분 끝에 짐을 다 찾아 택시를 타러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대기 줄이 300미터입니다.

그러나 택시는 뜨문뜨문 오고 사람들은 기다리다 추위에 지쳐 공항 안으로 들어와 대책을 강구합니다. 카카오택시, 콜택시 모든 택시는 다 불통입니다. 당황해 허둥지둥하는데 윤아가 쏘카 아이디어를 냅니다.

윤아와 정민이가 쏘카를 구하러 간 지 30분쯤 후 드디어 우리가 타고 갈 차량이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호텔에 도착하여 방에 들어서니 12시.

<평범한 하루>로 예상되었던 2021년 12월 26일은 정말 <특별한 하루>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특별한 하루가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습니다. 먼 훗날 우리 가족은 그날 행복했다고 회상할 겁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1.12.27. 조근호 드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