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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번째 편지 - 조근호 삭발하다



저는 오래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행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삭발>입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몸에 해 볼 수 있는 파격적인 일 중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미치고 싶을 때가, 아니 미친 짓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 삭발은 그런 것입니다.

후배들 중에 삭발을 한 친구들이 몇몇 있습니다. 그들은 직업상 무엇인가 튀어야 했기에 삭발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삭발을 하니 너무 편해서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9월 초 미용실에 가서 무작정 완전 삭발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미용사는 완전 삭발은 너무 심한 도전이니 9미리 삭발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9미리 삭발이란 머리를 9mm 길이로 삭발하는 것입니다.

미용사는 저에게 인터넷상에 있는 삭발 이미지를 몇 개 보여주었습니다. 젊은 연예인들의 삭발 모습은 흉하기보다는 멋있어 보였습니다. 특히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삭발한 모습은 간지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미용사의 권유에 따라 9미리 삭발을 하였습니다. 바리깡으로 시원하게 미니 머리가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갔습니다. 바리깡을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머리는 금세 예전 중학교 시절 머리 같아졌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듣던 바리깡이라는 명칭은 과연 어느 나라 말일까요. 네이버 어학 사전을 찾아보니 바리깡은 바리캉의 비표준어입니다.

바리캉은 양털 깎는 기구를 개조해서 만든 머리 깎기 기구입니다. 프랑스의 'Bariquand et Marre'라는 회사의 머리 깎기 제품이 일본에 1883년경 소개되어 <상표의 보통명사화> 과정을 거쳐 바리칸(バリカン)이라는 일본식 외래어로 정착하게 된 후 한국에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삭발한 제 모습을 보니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닙니다. 점점 익숙해질 것입니다. 가족들의 반응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모습을 본 가족들의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딸아이가 뭔가 부족하다며 연신 머리를 이리 보고 저리 봅니다. 그러더니 내일 자기가 다니는 미용실을 가잡니다. 결국 딸아이의 등쌀에 또 다른 미용실을 찾았습니다.

홍대 입구에 있는 이 미용실은 삭발하는 사람들이 꽤 방문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예술가들 중에 삭발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즐겨 이용하는 미용실이 있기는 할 것 같습니다.

미용실 사장인 헤어디자이너는 삭발에도 멋이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 삭발이 아닌 이상 같은 길이로 자르기보다는 옆머리는 거의 완전 삭발 정도로 짧게 자르고 가운데 머리는 좀 길게 잘라야 멋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는 똑같은 길이로 잘라 멋이 안 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양 옆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운데 머리가 좀 짧기는 하지만 완전 검은색으로 염색을 한 후에 예전에 가르마를 타던 자리를 스크래치를 내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리깡으로 머리 깎은 비용의 몇 배를 주고 머리에 멋을 내고 나니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좀 젊어진 것 같습니다. 저는 삭발에 이런 복잡한 요소들이 들어 있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삭발하는 것을 <패션 삭발>이라고 한답니다. 삭발에도 패션이 있는 것입니다. 이 패션 삭발 상태로 거의 3주를 지내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여 모자도 쓰고 상대방에게 구질구질하게 설명도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검찰청에 들어가 여검사를 만날 때는 '삭발해서 미안합니다' 라고 인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3주간을 삭발 상태로 살아보니 이리 편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 감고 수건으로 몇 번 쓱쓱 문지르면 끝입니다. 다시 머리를 기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당분간은 이 상태로 살아보렵니다.

각국의 미용 문화는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누적되어 형성된 것입니다. 제가 60년 넘게 따라온 헤어스타일도 그들의 작품입니다. 저는 그들이 만든 문화에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다가는 실패할 확률이 높아 대부분 해야 할 일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라"는 명제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제약 때문에 제대로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삭발을 통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는 마음속 명제를 과감하게 실천해 보고 싶었습니다. 서두에 삭발을 미친 짓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친 짓이란 세간의 인식에 허용되지 않는 일을 뜻합니다.

저는 세상의 인식과 반대로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고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머리를 잘랐냐고 묻지만 이내 익숙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 혼자 세상 인식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삭발한 후배들에게 삭발 사진을 보냈더니 이런 반응이 왔습니다.

"오!! 대표님!! 형제님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옷!!!! 두상이 아주 예쁘십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더 젊고 강해 보여서 좋습니다."

"엇 형님 군대 재입대. 무모한 형제들에게 추천할게요 ㅋㅋ"

그들이 보인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젊고 강하게 느껴진다'와 '형제적 연대감을 느낀다' 였습니다.

무모(無毛)한 형제들, 삭발은 왜 형제적 유대감을 느끼게 할까요. 소수이고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일까요. 그 문화적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삭발들끼리는 묘한 연대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미친 짓을 하고 싶을 때가 있으신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1.9.27.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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