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681번째 편지 - 94세 어머님의 꿈



전쟁 같은 주말을 보냈습니다. 어머님이 또 입원을 하셔서 토요일과 일요일을 병실에서 보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님과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는 저 사이에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고통과 고통 사이에 간간이 주무시는 어머님을 바라보며 94세의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꿈꾸는 일이 더 허락되지 않고 그저 종착역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일 밖에 없는 인생. 저는 그 어머님께 꿈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어머님, 지금 병환으로 힘드셔도 나아서 집으로 가셔야죠. 손주 4명이 아직 아무도 결혼하지 않았잖아요. 그 아이들이 결혼하는 것도 보시고, 또 증손주를 낳는 것도 보셔야죠. 어머님, 그런 기쁜 꿈을 꾸세요."

온몸이 아프다고 호소하시는 어머님,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고함치는 어머님께 이 꿈이 현실로 느껴지실까요? 이루어질 거라고 믿게 되실까요? 역사 속의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의 처지와 관계없이, 그것이 인간이 가진 위대한 점이니까요.

"어머님, 손주들 결혼과 증손주 탄생을 꿈꾸세요. 간절히 꿈꾸세요. 꿈이 달성되지 않는 것은 간절히 꿈꾸지 않아 서래요. 알아들으시나요?"

저는 어머님께 어쩌면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는 꿈 이야기를 해 드리며 노래 하나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 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돈키호테를 뮤지컬로 만든 <맨 오브라만차>에서 돈키호테가 부르는 노래 "이룰 수 없는 꿈"의 가사입니다.

제가 어머님께 꿈을 이야기해드렸지만 오히려 어머님은 언제나 늘, 고통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아름다운 꿈을 꾸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2011년 1월 10일 어머님이 84세이던 해, 그때도 입원하신 어머님을 바라보며 "거울 앞에 서보세요. 무엇이 보이나요."라는 제목의 월요편지를 썼던 적이 있습니다. 그 월요편지에는 이런 시가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간호사 아가씨들/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중략)

어느새 노파가 되어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하네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내 심장 자리에 이젠 돌덩이가 자리 잡았네요/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처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 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그리고 이젠 사랑도 삶도 다시 즐겨보고 싶어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나도 짧았고 너무나도 빨리 가 버렸네요/

내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모두들 눈을 크게 떠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봐주세요/

제가 괴팍한 할망구라뇨/ 제발/ 제대로 한 번만 바라보아주어요/ ‘나’의 참모습을 말이에요"

밤만 되면 선망 증세를 보이시며 고함을 치시는 어머님, 수액주사를 다 빼버리겠다고 제 손을 밀어내는 어머님, 이를 완력으로 저지하자 험악한 말을 뱉는 어머님.

그 어머님 안에도 16살 처녀가 살고 있을 것이고, "저를 낳고 키워주신 아름답고 따뜻한 어머님"도 한구석에서 숨 쉬고 있을 것입니다.

새벽 3시쯤입니다.

어머님이 옆에서 자고 있는 저를 부르기에 불을 켜고 다가가 보니 이불 한 쪽을 들고는 옆에 들어와 누우라고 하십니다. "추우니 들어와"

"저를 낳고 키워주신 아름답고 따뜻한 그 어머님"이 깨어나신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을 껴안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꿈이 다 이루어지시길 기도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1.8.2. 조근호 드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