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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번째 편지 - 절제, 달성하기 힘든 주제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족저 근막염 때문에 걷는 것이 불편하더니 결국 한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들어 지난주 금요일 다시 정형외과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놔두었습니까? 걷기에 엄청 불편하였을 텐데." "심한 편인가요?" "족저 근막염의 증세로는 최악인 상태입니다." "치료할 수 있을까요."

"의사로서는 이 정도 환자는 좀 거리를 두는 편입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이 병은 환자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병입니다. 즉 환자가 걷는 것을 자제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환자가 협조하지 않는 상태에서 의사가 완치를 약속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한 달 전쯤 같은 증세로 이 병원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잘 알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너무 골프를 많이 쳤더니 발바닥이 아파서 왔습니다." "족저 근막염입니다. 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덜 걷는 수밖에 없습니다. 골프를 줄이십시오."

그러나 실제 생활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먹으면서 계속해서 골프를 하였습니다. 코로나19 이전에 비하면 두 배쯤 많이 친 것 같습니다. 한 달에 열댓 번을 쳤으니까요.

이번에 병원을 찾은 것도 전날 골프를 치고 발이 너무 아파 병원을 간 것입니다. 결국 저의 자제력 부족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아마도 제 아들이 이 지경이 되었으면 제가 엄청 화를 내면서 야단쳤을 것입니다. "골프 줄이라니까 그것도 못 해. 그러다 결국 못 걷게 될 거야."

이런 화를 저 자신에게 내야 할 판입니다. 늦었지만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인 사망 이외에는 취소할 수 없다는 골프 약속을 줄줄이 취소하였습니다. 약 2주 치 골프 약속을 사정을 구구이 설명하며 취소하였습니다. 다들 이 상황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어린아이도 아닌 육십이 넘은 제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주말 내내 절뚝거리며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절제>,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명제에 저도 부닥친 것입니다.

저는 잘 압니다. 무절제의 끝이 무엇인지. 김상근 교수님과 고전 공부를 하면서 배운 파멸의 공식은 무절제를 징검다리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먼저 부(富)(올보스 Olbos)가 많아지면 무절제(코로스 Koros)해지고 이 무절제는 결국 오만(휘브리스 Hybris)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 오만의 끝은 파멸(아테 Ate)이지요." (365번째 월요편지 - 겸손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시나요?)

골프에 재미를 붙이면(올보스) 골프 횟수가 많아지고 약속을 자제하지 못하여 한 달에 열댓번을 치면서(코로스) 의사의 경고도 무시한 채 별일 없겠지 하고 족저 근막염 증세를 경시하면(휘브리스) 결국 걷지 못하는 지경(아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와 현실은 별개인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요? 문득 월요편지에서 <절제>에 대해 얼마나 자주 썼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월요편지 사이트에서 <절제>라는 단어를 넣고 검색한 후 월요편지를 하나하나 읽어보니 모두 10번의 월요편지에서 <절제>를 언급하였습니다.

"행복이란 <절제>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 더 큰 집, 고급 자동차, 럭셔리 해외여행이 아니라 덜 누리는 것이 더 많은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도 착각을 한 듯합니다. 지금 누리는 소박한 휴식보다 나중에 누리는 화려한 휴식이 더 달콤할 것이라는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132번째 월요편지 휴식, 자신과의 만남)

"몇 년에 한 번씩 포도 단식을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포도를 먹기 위해서 필요한 그릇은 접시 하나였습니다. 저는 부엌의 수많은 그릇을 보면서 인간의 먹는 데 대한 욕망이 이렇게 수많은 물건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는 단식을 하게 되자 평소 보이지 않았던 물건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생긴 것입니다." (145번째 월요편지 물건 ‘100개만으로 살아보기’가 가능할까요?)

"세월은 우리의 스승이 되어 우리에게 성공보다 행복이 중요함을 가르쳤고, 풍요로움이 아닌 <절제> 속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일깨워 주었으며, 폭탄주에 취하기보다는 시 한 수에 취할 수 있는 감성을 키워주었습니다." (149번째 월요편지 어떤 행복포럼)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이 재탄생 되기를 바랐을 지도 모릅니다. 추악한 자신을 죽이는 겸허함을 통해 새롭게 재출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비록 신이 그 출발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번 여행을 마치며 카라바조처럼 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교만, 욕망의 조근호를 죽이고 겸손, <절제>의 조근호를 재탄생 시키고 싶었습니다." (282번째 월요편지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의 작품을 통해 만난 또 다른 나)

"한번 잃은 자제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아 주말에도 폭식까지는 아니지만, 음식 앞에서 <절제>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월요편지를 쓰고 있는 2016년 11월 21일 월요일 6시 44분 이 순간 체중계 위에 올라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잘 <절제>하고 내일 용기를 내어 체중을 재렵니다." (374번째 월요편지 개인과 국가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쉰 목을 생각하면 건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쉬어야 할 때는 쉬고, 참아야 할 때는 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조화와 <절제> 오늘 아침의 화두입니다." (523번째 월요편지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하는 몸)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사회적 관계를 맺어 왔는지, 그 관계가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런 복잡하고 부산한 사회적 관계없이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기<절제>를 숙고하게 된 것입니다." (615번째 월요편지 코로나19가 던진 사회적 관계의 '자기절제' 문제)

월요편지를 다시 읽어보니 제가 절제에 실패한 부문은 세 가지였습니다. 무절제한 <음식>, 무절제한 <운동>, 무절제한 <만남>. 이 세 가지가 제가 가장 절제하기 힘든 영역이었습니다. 이번 족저 근막염은 무절제한 운동과 무절제한 만남이 결합하여 빚어낸 파멸입니다.

저의 파멸은 무엇을 몰라서 빚어진 것은 아닙니다. 알면서도 교정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보다 몇 배의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몇 년 전 강점 테스트(Clifton Strengths 34)라는 것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의 특성인 34가지 강점 중에 저는 첫 번째가 승부(Competition)였고 두 번째가 행동(Activator)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두 가지 특성이 결합하여 저를 무절제로 이끄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음식, 운동, 만남 이 세 가지 영역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서 현재 무절제(코로스 Koros) 상태인지, 더 나아가 오만(휘브리스 Hybris)에 이르지는 않았는지 살필 것입니다. 그래야 파멸(아테 Ate)을 피할 테니까요.

여러분은 잘 절제하고 계시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1.7.5.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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