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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번째 편지 - 떠나간 벚꽃을 추억하며



천지가 꽃동산입니다. 특히 영산홍이 여기저기 피어 있습니다. 조경수의 15%가 영산홍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영산홍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꽃이 붉은 것은 영산홍, 자색인 것은 자산홍, 흰 것은 백영산이라고 부른답니다.

영산홍이 피기 전에는 벚꽃이 우리 곁을 다녀갔습니다. 영산홍은 꽤 오래 피어 있습니다. 반면 벚꽃은 일주일도 채 피지 않고 떨어집니다. 아마 우리 곁에 있는 시간으로 치면 영산홍이 벚꽃의 몇 배는 될 것입니다.

영산홍은 벚꽃 못지않게 우리네 삶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들은 벚꽃만 편애합니다. 벚꽃에 관한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영산홍을 노래한 시는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영산홍 입장에서 보면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디에 탄원서라도 내야 할 판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그렇게 많이 심어 즐기면서도 왜 우리에 대해 노래하지 않는 건가요. 벚꽃은 불과 일주일도 채 못 즐기면서 수많은 시로 벚꽃을 기리는가요. 이것이야말로 불공정입니다."

저는 가슴에 무엇인가 느껴질 때마다 일본 하이쿠를 재해석하여 제 나름의 감성을 덧붙여 쓴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2020년 11월 30일 자 월요편지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 구경이어라')

그런데 오늘 아침 그 하이쿠 재해석 글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2021년 3월 31일부터 어제까지 모두 9편을 썼는데 그중 6편이 벚꽃에 관한 글입니다. 물론 영산홍에 대한 글은 하나도 없습니다.

2021년 3월 31일

늘 그랬다/ 언제 봄이 오려나/ 절망하고 있을 때/ 늘 그랬다/ 갑자기 환해지는 세상/ 벚꽃이 몰래 기습적으로/ 우리 곁에 찾아왔다/ 이제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이 점령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얼마 안가 갑자기/ 봄 비와 함께/ 이 벚꽃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리라는 것을/ 그러면 또 느낄 것이다/ 그때의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사라진 벚꽃/ 같다는 것을

이렇게 시작한 벚꽃에 대한 노래는 그 다음날 4월 1일에도 이어집니다. 굵은 글씨체에 밑줄 친 부분이 하이쿠 원문입니다.

2021년 4월 1일

어머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100세까지 6년/ 하루하루/ 날을 셀 수 있을 만큼의 적은 시간/ 벚꽃이 여섯 번/ 피고 지는 시간/ 어머님에게 보여드리고 싶다/ 이 활짝 핀 벚꽃을/ 어머님 마음은 이러리라/ "벚꽃 피어서 죽고 싶지 않지만 몸이 병들어 움직일 수도 없는데/ 또 벚꽃이라니"/ 그래도 올해 또/ 어머님을 모시고/ 벚꽃 구경을 나선다

벚꽃은 그 다음날도 저의 가슴에 불덩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 불덩이를 글로 꺼내지 않으면 제가 타 들어 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또 씁니다.

2021년 4월 2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벚꽃이/ 이내 질 것을 압니다/ 시간의 틈 사이에/ 영원 같은 한 순간/ 바로 지금이 벚꽃이 피는/ 그 순간입니다/ 벚꽃 하면 생각나는/ 많은 것 중에 두 가지가/ 유독 도드라집니다/ "초속 5센티미터"/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입니다/ 그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하이쿠/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벚꽃 아래서/ 만난 두 사람은/ 언제나 그들 사이에/ 피어있던 벚꽃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벚꽃이 지고 없는 그때도/ 벚꽃이 있는 이 시간의 틈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습니다

이 시인이 노래한 "두 사람의 생"의 그 두 사람은 저와 어머님입니다. 저는 매년 벚꽃이 필 때면 벚꽃 아래에서 미소 짓던 어머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드디어 4월 5일 어머님을 모시고 벚꽃 구경을 하였습니다.

2021년 4월 6일

어제는 어머님을 모시고/ 벚꽃 구경을 하였다/ 매년 해오는 행사지만/ 올해는 더욱 마음 졸였다/ 토요일 하루 종일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기 때문이다/ 벚꽃을 모두 가져가려는 듯/ 그런데 생각해 보면/ 봄비는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벚꽃이 이별할 시간이라며/ 봄비를 부른 것이다/ 이렇게 한가로운 봄날에 왜 벚꽃은 이렇게 서둘러 지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가 벚꽃에게/ 서운하게 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내년에는 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지금부터 부탁해보자

이제 벚꽃과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짧았기에 더 안타까운 이별. 시인들은 그 이별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1년 4월 7일

도둑처럼/ 몰래 피었다가/ 작별 인사도 없이/ 어느새 가버린 벚꽃/ 벚꽃 일생 고작 일주일/ 지는 벚꽃도 남은 벚꽃도 내일이면 지는 벚꽃/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 지는 석양 같은 노년이나/ 이제 활짝 핀 청춘이나/ 100년도 못 돼 사라질 운명

봄비가 벚꽃을 모두 데리고 가버립니다. 아아 벚꽃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2021년 4월 13일

어제도 그제도/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벚꽃을 한 잎도 남김없이/ 다 데려가려는 듯/ 벚꽃에만 내린다/ 지난주 핀 벚꽃/ 어머님과 같이 본 벚꽃/ 골프장에서 본 벚꽃/ 집 창문을 통해 본 벚꽃/ 그리고 밤에 핀 벚꽃/ 모두 모두 사라진 오늘/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 벚꽃이 없는 350일/ 기다려야 하는 350일/ 나는 견딜 힘이 있을까

저는 이렇게 벚꽃과 잠시 같이 살았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글을 쏟아 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하루를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이제 그 꽃자리를 영산홍이 꿰찼습니다. 그러나 제 가슴의 빈자리를 영산홍이 채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영산홍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한 일이지만 영산홍을 그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두려워집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봄날은 깊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봄날을 어떻게 만나고 계시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1.5.3.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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