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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번째 편지 - 올하트 받지 말 걸 그랬나 봐



지난주 금요일 퇴근하였더니 아내와 딸 아이가 올레TV에서 예능프로를 다운받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미스트롯2>였습니다. 저녁 식사 내내 <미스트롯2>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아이가 연신 돌려보기를 하며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출연자를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초등부 경연 때였습니다. 맨 처음 출연자는 임서원(10살)입니다. 노래와 춤은 물론 놀랄 정도의 선천적 끼가 있는 친구였습니다. 심사위원들의 넋을 빼놓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임서원은 TV 출연 경력이 있고, 2018년 <삼촌과 조카의 댄스>라는 유튜브로 조회수 700만을 넘었고, 자신이 삼촌과 같이 운영하는 유튜브의 구독자가 3만 명을 넘는 이미 팬덤을 보유한 준 연예인이었습니다.

임서원은 당연히 심사위원 15명 전원으로부터 하트를 받으리라 기대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심사위원이 하트를 누르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마침 다음 순서는 황승아(9살), 나이에 비해 유난히 작은 체구라 아장아장 걷는 것도 불안해 보일 정도입니다. 심사위원들도 "완전 애기네"라고 귀여워합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카랑카랑합니다.

황승아가 부른 노래는 1956년 작 <단장의 미아리 고개>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잃은 부인의 애끓는 심정을 담은 애절한 노래입니다. 이 감정을 9살 꼬마가 과연 담아낼 수 있을까요? 결과는 그런 우려를 완전히 씻어내고 올 하트를 받았습니다.

다음 순서는 국악 신동이라는 김태연(9살)입니다. 국악을 배운 친구답게 안정된 목소리로 <대전부르스>를 멋지게 소화합니다. 결과는 황승아에 이어 올하트입니다. 이어지는 무대는 김수빈(12세)입니다. 춤과 노래가 잘 어우러져 역시 올하트를 받습니다.

3명이 연속으로 올하트를 받으니 초등부 출연자 석은 난리가 났습니다. 이때 카메라가 울먹이는 한 친구를 잡았습니다. 14개 하트를 받은 임서원입니다. 친구 3명이 연달아 올하트를 받았으니까요.

울음이 점점 커집니다. 사회자가 어쩔 줄 모릅니다. '서원이도 너무 잘한 거예요'라고 달래보지만 울음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다가가 위로해 줍니다. 이때 한 친구의 말이 제 귀에 들어왔습니다.

"올하트 받지 말 걸 그랬나 봐." 황승아가 내뱉은 말입니다.

친구의 서러움에 공감하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지만 저는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9살 꼬마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 올 수 있을까? 당연히 속상해하는 친구를 위로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받은 올하트가 원인이라고 '받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감동은 이어지는 순서에 금방 묻혀 버렸습니다. 저녁 식사는 끝이 났지만 이미 TV에 포로가 된 우리는 자리를 뜰 줄 몰랐습니다. 신이 난 딸아이는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을 소개하였습니다.

"아빠 요즘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대세에요. 한번 보실래요." 오디션 프로그램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저였지만 오랜만에 가족들이 흥겨운 시간을 가지는 상황을 깨고 싶지 않았습니다.

딸아이는 앞으로 감기와 뒤로 감기를 셀 수 없이 하며 여러 출연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출연자는 30호 출연자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름 대신 번호로 호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배 아픈 가수'라고 소개했습니다. "제 재능 중 하나가 뛰어나신 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게 제 재능이거든요. TV를 보면 배가 아파서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도 많이 안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매력을 발산합니다. 한 여성 심사위원이 그가 부른 노래 가사에 나오는 '웬만하면 내게 오지' 대목에서 "웬만하면 갈 뻔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여성 심사위원은 간주 부분에서 "이 남자가 나랑 밀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식의 극찬을 해 줍니다.

당연히 2라운드에 진출하였습니다. 2라운드는 1라운드 통과 출연자들을 심사위원들이 2명씩 짝지어 대결을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30호는 63호와 한 팀이 되어 10호와 29호의 팀과 경연을 펼쳤습니다.

심사 결과는 6대 2로 30호가 속한 팀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승리한 팀의 2명은 2라운드를 통과하고, 패배한 팀의 2명 중 한 명은 탈락한다는 사회자의 설명이 이어지는 순간 갑자기 30호가 울기 시작합니다.

사회자, 경쟁 팀원, 심사위원 모두 어리둥절해 합니다. 사회자가 물어봅니다. "왜 우세요." 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합니다. 오히려 경쟁팀의 29호가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저희들이 너무 잘 지냈거든요. 상대 팀과의 대결 구도가 아니고. 대기실에서도 그렇고. 밥도 같이 먹었거든요. 짧은 시간에 너무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이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30호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는 정을 나눈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이 마음. 시기와 질투가 재능이라는 젊은이가 보여준 이 장면은 절대 가식으로 만들 수 없는 장면입니다. 가슴속 본성이 오롯이 드러난 것입니다.

'9살 꼬마 황승아가 보여준 마음'과 '31살 30호 젊은이가 보여준 또 다른 마음'은 승자가 패자를 짓이기는 오늘날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수많은 고전의 스승들이 인류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그것들. 사랑, 자비, 겸손, 배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무 각박하게 살아온 우리 세대들은 비록 가지지 못했지만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치열하게 다투며 살지만 내일은 이들이 보여준 마음이 점점 커져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거라는 기대가 생깁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12.21.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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