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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번째 편지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께서 별세하였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을 떠올렸습니다. (2019년 9월 16일 자 월요편지 <추석, 조상들의 obituary를 읽는 시간> 참고)

이 책은 1851년 9월 18일, 뉴욕 타임스 창간일부터 2016년 5월 31일, 이 책의 편집일까지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 중 업적, 명성, 그리고 사회에 미친 영향을 기준으로 선택된 인물에 대한 부고 기사 모음집입니다.

저는 그 책의 <재계의 거물들> 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임종 순간과 그들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평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철도왕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1794년 5월 27일 - 1877년 1월 4일)입니다.

"밴더빌트는 어제 오전 워싱턴 플레이스가 10번지 자택에서 별세했다. 최근 8개월 동안 그는 방에서만 지냈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오랫동안 앓아온 질환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인한 탈진이었다.

가족들은 날이 밝자마자 밴더빌트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모여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기도가 시작되었다. 밴더빌트도 함께 기도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약해졌고, 죽음을 이기지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재계 거물의 임종 모습도 일반인의 임종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부고 기사(obituary)는 그의 업적을 장황하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업적보다 그의 인간됨이었습니다.

"밴더빌트는 남들보다 늘 세 가지가 뛰어났다. 가족과 친구에 대한 넘치는 애정, 과시 혐오, 그리고 여유를 즐기는 품성이 그것이었다. 일할 때는 강철 같았지만 사적으로는 애정이 넘치는 삶을 살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기업인이, 그것도 재계의 총수가 '여유를 즐기는 품성'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미소'를 간직했다는 대목에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죠.

다음은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1835년 11월 25일 - 1919년 8월 11일)입니다.

"카네기가 오늘 아침 7시 10분 매사추세츠주 쉐도우 부록에서 기관지 폐렴으로 별세했다. 지난 금요일 아침 카네기는 아내와 딸 로스웰 밀러와 함께 자신의 사유지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였다.

금요일 저녁, 그는 숨쉬기가 조금 힘들다고 말했지만 감기 이외에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토요일 아침에는 훨씬 나아져 집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낮이 되면서 점차 상태가 나빠지는 듯했다. 일요일, 카네기는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8개월간 방에만 있었던 밴더빌트와는 달리 카네기는 금요일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다가 일요일 갑자기 사망하였습니다. 부고 기사 중에 그의 <수치스러운 죽음>이라는 인터뷰 글이 눈길을 끕니다.

"수백만 달러의 재산을 처분할 자유가 있는 사람이 죽음을 목전에 둔 것을 알고도 자신 뒤에 재물을 남겨두고 떠난다면, 가져갈 수 없는 그 쓰레기를 어디에 쓰려고 했던 간에, 그는 '그를 위한 눈물을 흘리는 자 없이, 그를 존경하는 이 없이, 그를 찬양하는 이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런 걸 두고 대중을 이렇게 말하겠죠. '부유한 채 죽는 이는 수치스럽게 죽는 것이다.'" 왜 돈을 버는 것인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석유왕 <존 D. 록펠러> (1839년 7월 8일 - 1937년 5월 23일)입니다.

"1939년 7월 9일까지 살아서 인생의 한 세기를 채우고자 했던 록펠러가 오늘 새벽 4시 5분 겨울별장 케이스먼트에서 그 목표를 2년 남짓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록펠러의 아들 록펠러 주니어가 아버지 상태에 관해 걱정할 것이 전혀 없다고 장담한 지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나이 든 자선사업가 록펠러는 수면 중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부자인 데다가 98세까지 천수를 누렸으니 록펠러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록펠러는 현업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돈을 '모은 사람'이었으나 은퇴 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베푼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의 말년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년의 록펠러는 사람들에게 더 상냥한 모습을 보였다. 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페리선 위에서 노래하는 가수들에게 반짝거리는 새 동전을 선물로 나눠주면서 말이다."

카네기와 록펠러는 자선사업으로 자신들의 마지막 인생을 장식했습니다. 뉴욕에 있는 카네기홀과 록펠러센터가 바로 그 유산입니다.

그 책에는 전부 8명의 부고 기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위 세 명 이외에도 JP 모건, 헨리 포드, 하워드 휴스, 레이 크록, 스티브 잡스 등입니다.

부고 기사는 특징이 사망 직후 바로 뉴욕타임스에 게재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명인에 대한 부고 기사는 미리 써 놓는 모양입니다.

이건희 회장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직후 뉴욕타임스를 확인하였더니 "Lee Kun-hee of Samsung Dies at 78; Built an Electronics Titan"라는 제목의 obituary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미 작성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고 기사의 첫 대목은 이건희 회장이 부정부패로 두 차례 기소되었고 두 차례 사면되었다는 내용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진도 2008년 특검에 출두하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을 게재하였습니다.

이런 시각이 이 글을 쓴 기자만의 시각인지, 뉴욕타임스의 시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재계의 거물들도 다 인생의 그림자가 있었을 텐데 유독 이건희 회장의 부고 기사에만 부각시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기사는 제가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에서 읽은 재계 거물들의 부고 기사와 같이 이건희 회장의 업적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상세히 기재하고 있었고, 우리가 잘 아는 "마누라하고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일화 등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부고 기사도 언젠가 뉴욕타임스의 부고 모음집 후속편에 분명히 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대한민국 재계의 거물이 아니라 세계 재계의 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0.10.26.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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