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639번째 편지 - 보람 있다, 즐겁다, 기쁘다

 

드디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번 주 금요일 오후 7시 반 부산 소재 금정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토크 콘서트 <행복의 비브라토>는 예정대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콘서트 중간중간에 도합 4번, 각 10분씩 이야기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야기 소재를 찾다 보니 여러 가지가 신경이 쓰입니다.

사실 제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너무 강의 같다는 주위의 반응 때문에 정작 하게 될지는 모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시 못하게 될지 몰라 오늘 그 이야기를 미리 월요편지에서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외래어입니다. 1811년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 <암액리아흥학(諳厄利亜興学)> 10권이 만들어질 때 누군가가 영어 Happiness를 한자어 <행복>으로 번역한 것이 최초입니다. 우리나라는 그것을 그대로 도입하였습니다.

사물어는 생활 속에서 저절로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물건을 지칭하는 명사, 동작을 설명하는 동사, 느낌을 묘사하는 형용사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개념어는 그 뜻이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특히 철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행복>도 그런 개념어 중 하나입니다.

'행복하다'라는 뜻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요. 그러나 그 비슷한 형용사인 '좋다', '신난다', '멋지다', '보람 있다', '즐겁다', '기쁘다'는 모두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행복하다'는 어렵고, '즐겁다'는 쉽다는 말입니다. <행복>이 어려운 것은 여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호메로스가 쓴 <오딧세이아>의 한 장면입니다. 오딧세우스는 지하세계에 가서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에게 '살아 있을 때도 그리스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더니 죽어서도 죽은 자들을 통치하는 제왕이 되었으니 행복하겠다'라고 치켜세웁니다. 그러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오딧세우스여. 나를 위로하려 하시지 마시오. 나는 죽어 사자들의 나라를 통치하느니 차라리 시골에서 농토도 별로 없는 소작농의 머슴으로 살고 싶소."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한 행복은 <지상에서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들은 행복은 운명의 여신 소관으로 인간의 역량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에 반기를 듭니다. 행복이란 인간이 노력하면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의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넘어선 그 무엇, 지고지선이야 말로 인간의 갈망이요, 고귀한 목표라고 선언하고 이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행복은 미덕이었습니다. 영어로는 Virtue입니다. 우리말로는 착하게 사는 것, 의미 있게 사는 것, <보람>되게 사는 것 정도의 뜻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점점 <지상에서의 행복>이 아닌 <천상에서의 행복>으로 변질되었고, 중세에는 <천국에서의 행복>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 삶의 일부이던 <행복>은 우리가 살아서는 도달하기 쉽지 않은 그 무엇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나 버립니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지상으로 끄집어 내리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776년 제레미 벤담은 '자연은 인간을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가장 높은 두 주인의 지배하에 두었다' 전제하고, 따라서 '옳고 그름의 원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를 비롯한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이란 '즐거움의 극대화와 고통의 최소화'라고 정의하고, 행복의 양을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말한 즐거움은 바로 영어로 Pleasure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Pleasure를 번역하면서 쾌락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기쁨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쾌락에는 부정적 의미가 있고, 기쁨에는 다른 의미가 있어 다소 때가 덜 탄 <즐거움>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나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혼란기에 Virtue는 혁명 구호로 전락하고, Pleasure와 반대되는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더 이상 이 두 단어는 행복을 위해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2세 나폴레옹은 1791년 자신의 수필에서 '나는 왜 이 세상에 나왔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 사람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이렇게 공허한 마음으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 그 시대 젊은이들의 허무함을 적었습니다.

1802년 32세 베토벤은 유서에서 '오 신이여, 적어도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으로 충만한 날을 주소서, 내 안에서 진정한 기쁨이 메아리친 지가 너무도 오래되었나이다.'라고 자신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발견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프랑스 혁명 4년 전인 1785년 독일의 시인 실러가 쓴 환희의 송가 <Ode "An die Freude">에서 그들은 Freude, 바로 기쁨을 찾아냅니다. 기쁨, Joy는 전 유럽을 강타합니다. 바로 낭만주의의 시작입니다.

'기쁨은 낭만주의 어휘에서 중심적이고 반복적으로 나오는 용어이다. 때때로 행복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의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는 기쁨은 내부에서 분출되고 위로부터 쏟아져 내려온다.' 책 <행복의 역사>의 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Joy는 낭만주의가 유럽을 휩쓴 1800년부터 1850년 사이에 유럽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문학, 음악, 미술 등 각 분야의 예술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는 행복의 역사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춥니다.

1998년 마틴 샐리그먼이 시작한 긍정심리학은 행복을 연구하는 과학입니다. 긍정심리학자들은 '행복이란 의미와 재미의 교차로'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의미>는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Virtue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저는 <보람>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의미보다는 인생의 보람이 더 친근하고 쉽게 다가오지 않나요. <재미>는 제레미 벤담이 말한 Pleasure입니다. 쾌락이 아닌 <즐거움>말입니다. 저는 즐거움이 주는 어감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 빠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Joy입니다. <기쁨>은 행복과는 달리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행복의 역사는 행복에 여러 가지 의미가 덧칠해졌음을 알게 해줍니다.

행복이라는 개념어에는 Virtue(보람), Pleasure(즐거움), Joy(기쁨)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복하다고 쓸 때 어떤 때는 <보람 있다>라는 의미로, 어떤 때는 <즐겁다>로, 또 어떤 때는 <기쁘다>로 번역하여야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될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 다중적 의미의 <행복하다>보다 <보람 있다>, <즐겁다>, <기쁘다>를 많이 쓰면 좋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삶이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둘째 1850년 이후 사라진 Joy를 행복의 세상에 다시 초대하면 좋겠습니다. 바다의 일출과 석양의 노을을 감상하며 가슴에 기쁨이 다시 일렁일 때 우리는 저절로 행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강의는 이런 내용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10.12. 조근호 드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