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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번째 편지 - 나훈아의 [테스형]

 

나훈아의 신곡 <테스형>을 들어 보셨나요. 못 들으셨다면 먼저 듣고 오늘 월요편지를 읽으시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테스형>은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말합니다. 기원전 399년 5월 7일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사형당한 이래 소크라테스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이 존경도 하고, 비난도 하였지만 그를 형이라 부르며 대중가요 가사에 언급한 것은 아마도 나훈아가 처음이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를 가장 심하게 비난했던 니체는 책 <우상의 황혼>에서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최하층 출신에 속했다. 그는 천민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직접 볼 수 있다." 그의 조각상을 보면 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소개한 책 <주인과 심부름꾼>에 소크라테스 부분이 나옵니다.

"소크라테스 시대가 되면 인간의 감각에 대한 존경은 사라진다. 현상세계, 즉 감각 세계가 제공하는 것은 기만, 허상일 뿐이다. 사물의 관념이 사물 그 자체보다,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절대와 영원은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이후 2천 년간 서구철학사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긴다.

소크라테스가 문화의 영웅이 아니라 최초의 배신자라는 니체의 견해는 바로 여기서 나왔다. 그는 직관을 신뢰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하여 인간을 무지에서 일깨워 주었다고 배워온 소크라테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논리는 다분히 니체의 책 <우상의 황혼>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책을 정리한 <고전5미닛>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 번째 우상은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우상인 '참된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불완전하며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정의롭지도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계와 다른 완전하고 정의로운 '참된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어왔다.

그 참된 세계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식 명칭은 '이데아'이고, 그리스도교식 명칭은 '신의 나라, 천국'이다.

하지만 니체의 말에 따르면 '참된 세계'는 없다. 이는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이며 심리적 위로를 위해 꾸며낸 허구이다.

이 허구이자 허상이 긴 세월 동안 '저편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촉발 시키는 우상과 같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 글은 우리를 혼돈에 빠지게 합니다. 이데아와 천국이 허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참된 세계'를 어렵게 찾아낸 이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성 = 덕 = 행복>이라는 등식을 믿고 살았는데 니체는 이 등식이 고대 그리스인의 본능에 반하는 것이라고 일축합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종교 축제가 많았습니다. 신들이 많으니 그 신들을 위한 축제도 많았던 것입니다. 축제가 끝나면 부유층들은 자신의 집에서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심포지엄>에는 음주·가무가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음주 파티를 비난한 후, 심포지엄에서 술과 여인과 노래를 금지시키고, 참석자들이 오직 대화에만 전념하도록 가르칩니다. 대린 맥마흔이 쓴 <행복의 역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이 슬픈 세상에서 그리스인들을 위로해 왔던 감각적인 쾌락을 걷어 냈다. 이제 행복은 헤도니즘, 즉 쾌락주의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신과 같이 되는 것을 행복의 목표로 삼았다."

그 후 이천사백년이 지난 2020년 대한민국 가황 나훈아가 소크라테스에게 도전장을 내밉니다. 평생을 음주·가무와 함께 산 나훈아가 음주·가무를 심포지엄에서 없애버린 소크라테스에게 인생 토론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우상을 과격하게 논리 망치로 깨부순 니체와는 달리 나훈아는 역설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추방했던 바로 그 노래의 형식을 빌어 부드럽게 묻습니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나훈아는 소크라테스에게 당신 철학대로 살면 세상살이도 편하고 사랑도 쉽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천사백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가르침 '너 자신을 알라'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고 살았지만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대신 나훈아는 '아버지 산소의 제비꽃과 샛노란 들국화'를 소중하게 노래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세상이 아니냐고, 감각의 세계가 관념의 세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참된 것이 아니냐고 에둘러 말하고 있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나훈아는 테스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니체가 망치로 깨부수려 한 '참된 세계'. 바로 그것에 대해 나훈아가 테스형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니체와 완전히 다릅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참된 세계는 쓸모없고, 과잉된 관념 따라서 반박된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을 없애버리자."

그러나 나훈아는 애절하게 트로트 선율에 실어 소크라테스에게 묻습니다.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소크라테스는 과연 어떻게 답할까요?

이 <테스형>은 나훈아 작사, 나훈아 작곡입니다. 이 노래는 서양철학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니체의 <우상의 황혼>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노래가 끝나도 한참 동안 우리 가슴을 찡하게 울립니다.

또 <테스형>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위대한 철학자들의 수백 페이지 철학책을 무력하게 만드는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나훈아는 인생을 살면서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으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으라고 가르칩니다. 아픔을 웃음에 묻으라는 가르침이 너 자신을 알라보다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나훈아는 자신도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라며 이 두려움은 현상이고 현실이며 우리 모두가 겪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살라고 수용의 미학을 가르칩니다.

나훈아는 사물과 사람을 개념으로 구분 짓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아버지 산소에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라며 꽃과 서로 감정을 나눕니다. 이 순간, 소크라테스가 정연한 논리로 사람과 식물 사이에 세워 놓았던 경계는 단번에 허물어집니다.

<테스형>은 그저 트로트가 아닙니다. 서양을 이천사백년간 지배해온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부드럽게 무너뜨리는 일대 사건입니다.

나훈아는 이 노래로 진정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테스형>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9.14.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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