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630번째 편지 - 채은옥의 [빗물]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어머님이 퇴원하신지 하루 만에 집안일을 하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다가 물건에 부딪혀 넘어지는 바람에 갈비뼈 1개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집안이 뒤집어졌습니다. 어머님께서 퇴원 후 가만히 계시면서 건강을 회복하기만 하면 되는데 무슨 집안일을 하시겠다고 하시다가 갈비뼈 골절이라니. 화를 낼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답답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머님은 미안해하시고 동생은 펄펄 뛰고. 허허.

그다음 날 새벽,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차를 몰고 집을 나섰습니다. 비는 내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문을 연 커피숍도 없고. 마침 한 군데가 생각났습니다. 작년 정원 공사를 할 때 나무를 구입한 청계산 자락에 있는 둥지 조경을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아침 6시 반 나무들로 꽉 들어찬 둥지 조경에 인기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여러 번 다닌 적이 있어 나무들이 눈에 익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작은 길을 목적도 없이 걷습니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져 굴러내립니다. 비를 흠뻑 맞은 나무는 줄기의 힘줄에 힘을 잔뜩 줍니다. 여름꽃들은 비가 싫은 모양입니다. 꽃잎을 안으로 웅크립니다. 목백일홍 몇 그루의 진분홍색 꽃망울들은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듭니다.

걸으니 마음이 좀 진정됩니다. 핸드폰을 열어 음악을 골라봅니다. 비가 내리는 나무 정원을 걸을 때 들을 노래 중 최고는 무엇일까요. 저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이 노래를 골랐습니다. 비하면 바로 이 노래입니다.

수십 년을 들었지만 질리지 않는 노래, 바로 이 노래입니다. 어느 노래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채은옥의 <빗물>입니다. 젊은 분들은 이 곡을 모르실 수도 있지만 저와 같은 세대 중에 이 곡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찾은 채은옥의 <빗물>은 2012년 배철수가 사회를 본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채은옥이 부른 노래입니다. 입담 좋은 배철수는 들국화의 전인권의 표현을 빌려 채은옥을 평합니다.

"하얀 나비를 부른 김정호의 영향을 받아 여자로서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나르지도 않았고, 아주 차분한 노래들은 사람들을 넋 나가게 했다. 사람을 아주 쓸쓸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있었다."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날이 생각이 나네"

아마 이 구절을 수백 번은 더 들었을 것입니다. 빗물을 들으면 늘 소환되는 추억이 있습니다. 1976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 대일고등학교에 채은옥이 온 것입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채은옥 콘서트.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은 무아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날의 흥분을 2012년 9월 24일 자 월요편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저희들은 그녀가 몇 살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저희들의 여신이었습니다. 그녀 옷자락에 붙어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집은 어느 학생이 학교 내에서 스타가 되던 철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채은옥은 1955년생입니다. 그 당시 저희들보다 불과 서너 살 더 많은 누나였습니다. 당시 만 21살. 지금 중고등학생들이 BTS에 열광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2012년 채은옥의 <빗물>은 왠지 제가 기대하는 <빗물>과 달랐습니다. 나이 든 채은옥의 음색이 21살 채은옥의 음색과 같을 리 없습니다. 저는 다시 유튜브에서 21살 채은옥의 <빗물>을 찾았습니다. 참 신나는 세상입니다. 상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다 가능하니 말입니다.

<빗물>을 들으면 또 소환되는 추억이 있습니다. 고시 공부를 할 때였습니다. 고시 공부는 장기전이라 웬만한 뚝심으로는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핑계만 생기면 놀고 싶은 것이 고시생들입니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핑곗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공부할 마음이 사라집니다. 음악이 듣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이화여대 건너편 대흥동에 있던 웅지 고시원에 둥지를 틀고 있던 친구들은 비가 오면 영락없이 공부를 때려치우고 옆 건물 지하 다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초원다방>, 지금의 스타벅스입니다. 다방 여종업원에게 비에 관한 노래를 몽땅 틀어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1번은 채은옥의 <빗물>입니다. <빗물>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다방에서 노닥거렸죠.

추억에 잠겨 둥지 조경을 이리저리 걷노라니 빗줄기가 잦아듭니다. 산란했던 마음도 가닥을 잡아갑니다. 추억 속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노래 <빗물>과 같이 한 이 새벽 산책도 머지않아 추억이 됩니다.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돌아보면은 아무도 없고/ 쓸쓸하게 내리는 빗물 빗물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날이 생각이 나네"

언젠가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오늘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때 조용히 내리는 비는 어머님이 다치신 추억을 생각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날에도 어머님이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여전히 집안일을 하신다고 움직이시고 간섭하시길 기원해 봅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8.3. 조근호 드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