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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번째 편지 - 인문학 중독자

 

월요편지를 쓰다 보면 공부한 내용을 소개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난주 월요편지 [철학의 위안과 더 해빙]도 책 내용을 요약하고 이에 대한 제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단체 카카오톡 방을 보면 하루에도 서너 개의 좋은 글이 올라옵니다. 대부분은 누군가의 좋은 글을 펌 하는 경우가 많고 드물게 자신이 쓴 글을 올리지요. 이러다 보니 좋은 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SNS가 바꾸어 놓은 풍속도 중 하나일 것입니다. SNS가 처음 등장하던 무렵에는 이런 좋은 글이 너무 신기해 퍼 날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너무 감동적인 글은 가족 단톡방에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런 좋은 글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 좋은 줄은 알겠는데, 이것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 주는데." 하는 묘한 반감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월요편지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쩌다가 2008년부터 쓰기 시작한 월요편지가 멈출 시간을 놓쳐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감동'과 '격려'가 되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짜증'과 '시기'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월요편지 수신을 거부할 수 있게 하였고, 저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단톡방에서 탈출하고 싶어도 같이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그대로 머무는 경우가 많지요. 월요편지는 그 점에서 자유입니다.

댓글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글에 대해 누군가가 댓글을 달아주는 것은 자신의 수고에 대해 누군가가 해 주는 응원입니다. 그 응원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식의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 어찌 사람이 그렇게 대범하기만 한가요. [댓글 바라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제 월요편지가 단톡방에 게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댓글 바라기]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선배 한 분이 단톡방에 월요편지를 올려 달라고 했을 때도 이런 이유로 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월요편지를 통해 정리하여 전파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제 친구가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부인이 자신이 수많은 책을 사고, 많은 시간을 들여 책 읽는 것을 보고는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데 왜 하나도 달라지지 않나요."라고 하더랍니다.

왜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그 친구가 재미로 한 이야기겠지만 그 말에는 공부하는 이유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공부는 [삶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분이든지 바뀌어야 합니다.

월요편지는 [삶의 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변화의 추동력은 공부와 사색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았고 같은 주제를 깊이 있게 고민한 고전의 저자들로부터 그들의 지혜를 배워(공부) 이를 제 삶에 적용하기 위한 고민을 한 끝에(사색)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세계 문명권 중에 [공부]를 가장 강조한 문명이 중화문명입니다. 중화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유학의 가장 큰 스승 공자가 쓴 논어의 첫 대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학(學)]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공부의 목표가 [인격의 완성]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완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고양]이 더 현실적인 목표일 것입니다. 유학에서 말하는 [수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공부가 공부에서 머물고 인격의 고양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공부한 것만으로도 좋은 것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생각으로 혹시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공부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책도 읽고 강의도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화여대 윤정구 교수의 생각은 다릅니다. 2020년 3월 13일 자 칼럼 [인문학과 삶의 변화]에서 이렇게 일갈합니다.

"만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어 인문학의 도인이 되어도 이 읽은 내용들이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인문으로 소비되고 재생산되지 못한다면 인문학이란 그냥 지행격차만을 벌려놓는 신종마약일 뿐이다."

공부는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온 저에게는 폭탄과도 같은 발언입니다. 공부가 사색을 통해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면 [인문학 중독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자신의 고통에 위안을 주지만 잘못하면 신종마약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이 허전해지면 다시 인문학 수업을 찾아 들으러 가지만 삶의 변화는 없다." 윤 교수의 지적은 냉정합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을 느낍니다. 인문학도 그런 갈증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가 목표가 아니라 삶의 변화가 목표입니다. [칭찬]에 대해 아무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을 읽고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들어도 친구가 단톡방에 올린 글에 대해 칭찬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 스스로를 성찰하면 고전을 한 권 두 권 읽을 때마다 제 자신이 무엇인가 성장한 것 같고 남과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제가 변화한 것이 아니라 지적 우월감만 증가한 것뿐입니다. 거만이나 오만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느는 것이지요.

윤 교수는 구체적으로 이런 예를 듭니다. "(CEO들이) 조찬모임에 많이 참가해 교양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경영은 다른 방식으로 해서 구성원들에게 냉소주의를 심어주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평소 인문학적으로 말하던 것과 실제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월요편지가 제 지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공간이 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공부에 머물지 않고 사색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하여 독자들과 같이 고민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공부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공부는 어떤 의미가 있고 무슨 역할을 하는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6.8.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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