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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번째 편지 - [빠른 구속]과 [늦은 구속]

 

지난 3월 말 고교 동창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교통사고를 냈는데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로 대충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도와줄 여지가 별로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사고 운전자는 사고 당일 새벽 7시경 음주 상태로 공사용 덤프트럭을 몰다가 신호를 위반하고 좌회전한 과실로 반대편에서 직진해 오던 차량을 들이받아 운전자를 즉석에서 사망하게 한 것입니다.

아직 합의하지는 못했고 구속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간절한 부탁에 당사자를 한번 만나보기로 하였습니다. 몇 시간 후 사무실에 나타난 당사자의 모습은 얼이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우선 수사 진행 상황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그의 말로는 내일 경찰서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 시간이 촉박하여 후배 변호사에게 경찰 출석을 연기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상황을 전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경찰 조사는 마쳤고 내일이 구속 여부를 결정짓는 영장실질심사일이었습니다. 이때 시각은 저녁 7시, 영장실질심사 시각 내일 아침 10시까지는 15시간이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사건을 파악한 후 방어 논리를 수립하고 변호인 의견서를 작성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가슴 속에서 묘한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 사람을 꼭 도와주자." 저와 동갑이라는 것이 저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작년 11월 갑자기 아내를 잃었습니다. 졸지에 아내를 잃은 그는 생활이 무너졌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사고 전날 그의 친구가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습니다. 서로 신세 한탄을 하다가 소주 한잔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녁 9시경 잠자리에 들었다가 8시간을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덤프트럭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전날 술이 혈중에 남아 있어 사고 후 음주측정에서 음주운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사고지점을 아침 7시에 통과하였습니다. 삼거리에서 직진 신호를 좌회전 신호로 착각하고 좌회전하다가 반대편에서 마주 오던 차량과 정면충돌하여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음주운전과 신호위반, 두 가지 과실이 경합하여 사고를 초래한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변호인으로서 방어 논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였습니다.

첫째 음주운전이 문제였습니다. 전날 얼마나 술을 많이 먹었으면 다음날까지 술이 깨지 않았냐고 판사가 생각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에게 건강 상태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최근 건강검진을 하였는데 간경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의학적 소견은 분명치 않지만 간경화로 간의 알코올 해독 능력이 저하된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2019년 6월 25일 도로교통법 개정 전에는 음주운전 처벌 기준이 혈중알코올농도 0.05%였습니다. 처벌 강화 필요성에 따른 법 개정으로 이 기준이 0.03%로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사고 당시 그의 혈중알코올농도는 그 중간인 0.041%였습니다. 종전 기준으로는 음주운전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신호위반도 문제였습니다. 사실 가장 정확하게 방어 논리를 찾기 위해서는 현장을 사고 시각에 가보는 것이지만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사고 당시 현장 사진이 유일한 자료였습니다.

우선 사고 장소를 정확하게 알아야 했습니다. 구속영장에 기재된 주소로 구글 맵스를 찾았습니다. 여러 번 조작한 끝에 스트리트 뷰를 통해 현장 삼거리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장 사진에는 제한속도 60킬로미터의 표지판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신호위반 방어논리를 세웠습니다. 첫째 후방카메라를 조작하려다가 과실로 신호위반을 한 것일 뿐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둘째 큰 덤프트럭이 좌회전하는데 속도가 높을 수 없고, 시야가 탁 트인 왕복 6차선 도로인데다가 일출 직후 피해자가 해를 안고 운전하였음을 감안하여 피해자 과실 개입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고 운전자 측의 일방적 방어 논리일 뿐 객관적 상황은 음주운전과 신호위반이 경합된 교통사고 사망사건이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후배 변호사가 써온 변호인 의견서를 읽다가 뭔가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고민하였습니다.

"어떤 논리로 판사를 설득할 수 있을까? 이 사건에서 정의란 무엇일까?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운전자를 엄벌하는 것이 정의일까? 아니면 사죄와 합의의 시간을 갖도록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것이 정의일까?"

저는 고민 끝에 의견서에 이런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빠른 구속]으로 피의자에게 과한 처벌이 부과되는 것보다 다소 더디고 답답하더라도 [늦은 구속]을 통해 피의자에게 유족과 원만히 합의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정의의 실현이라고 본 변호인은 믿습니다.

만약 피의자가 사죄나 합의의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1심 재판에서 실형으로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빠른 구속]보다는 [늦은 구속]이 가져올 기회의 부여가 피의자와 피해자 유족 모두에게 원만한 해결의 시간이 되고 더 옳을 수 있다는 본 변호인의 믿음에 재판장님께서도 견해를 함께 해주시기를 간곡히 희망합니다."

영장실질심사 재판장은 이 믿음에 동의해 영장을 기각하였습니다. 그 후 사고 운전자는 유족과 원만하게 합의하였고 현재 1심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평생을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분야에서 일해 왔습니다. 어떤 때는 [빠른 구속]이, 어떤 때는 [늦은 구속]이 정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느 때 어느 것이 옳은지 모릅니다.

각 집단 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가고 있는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빠른 구속]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감은 익으면 저절로 떨어집니다. 익기 전에 따면 가지가 뜯겨 나가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0.5.6.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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