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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번째 편지 -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

 

저희 회사는 매달 한 번 마루파티라는 것을 합니다. 행복마루의 [마루]를 딴 파티입니다. 직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일하다 보니 한꺼번에 만날 날이 거의 없어 같이 모여 얼굴이나 보자는 의미에서 만든 파티입니다. 전 직원을 4명씩 조로 나누어 해당 조에서 그날의 마루파티를 기획합니다. 지난주 목요일이 바로 그 마루파티 날이었습니다.

이번 조는 야구 관람을 기획했습니다. 전 직원이 업무를 좀 일찍 마치고 잠실 야구장으로 모였습니다. 야구장 입구에서 만난 직원들은 모두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야구광인 직원도 있고, 야구 룰조차 모르는 직원도 있습니다. 몇 년 만에 야구장을 찾았다는 직원이 가장 많았습니다. 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2010년 부산고검장을 할 때 직원들과 같이 야구장을 가보고 무려 8년 만에 야구장을 찾은 것입니다.

이날의 경기는 홈팀 [두산]과 원정팀 [SK]의 경기입니다. 우리는 두산팀을 응원하는 1루 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관중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준비조가 준비한 햄버거와 콜라로 저녁을 때운 후 전광판을 쳐다보니 선수 중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6시 반이 되어 경기가 시작되자 열기가 슬슬 달아오릅니다. 1루 쪽은 거의 다 찼습니다. 응원석에서도 응원단장이 치어리더와 함께 흥을 돋웁니다.

1회 초 SK의 공격은 3자 범타로 끝났습니다. 이번에는 두산의 1회 말 공격입니다. 응원석이 바빠집니다. 음악도 점점 커집니다. 록 콘서트장에 온 것 같습니다. 시끄러워 경기에 집중이 안 됩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첫 안타가 나왔습니다. 2번 타자 최주환이 2루타를 친 것입니다. 제 뒷자리 앉아 응원하던 신용학 연구원이 신이 났습니다. 그는 두산 신인 투수 곽빈의 유니폼을 입고 올 정도로 두산 광팬입니다. 두산이 1점을 냈습니다. 그는 쓰러집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6회까지 2대2. 두산으로 기울던 경기가 SK가 따라잡으며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사실 저는 어느 편도 아니었습니다. 8년만에 경기장을 온 사람이 어느 편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6회까지 두산 쪽에서 관람을 하자 저도 모르게 두산 팬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응원가는 팀 응원가도 있고 선수 개개인 응원가도 있었습니다. 그 응원가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응원가 사이사이에 넣는 추임새도 일품이었습니다.

두산에 지명타자인 파레디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보듯 외국인 용병입니다. 경기 전 몸을 풀 때 체격이 확연히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키 191cm, 몸무게 95kg. 누가 보아도 홈런타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오자 관중들이 일제히 [제발]을 외쳤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이용훈 상무에게 물었습니다. "왜 [제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는 야구 해설자 수준의 식견을 가진 야구팬입니다.

"파레디스는 연봉 70만 달러를 주고 데리고 왔는데 너무 타율이 낮아 2군으로 두 번 내려갔다가 이번에 다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안타를 못 치자 관중들이 이제는 제발 안타를 쳐달라는 의미에서 [제발]을 외치는 겁니다." 옆자리에 앉은 어느 팬이 추임새를 넣습니다. "이젠 칠 때도 됐는데" 그러나 파레디스는 역시 헛스윙 3진 아웃입니다.

그래도 두산 팬들은 즐겁습니다. 예상대로라는 반응입니다. 그가 연속 헛스윙하는 것도 재미입니다. 야구장은 살벌한 승부만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즐겁게 노는 한판 놀이터였습니다. 과연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음악과 함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응원단장은 상대 팀 투수가 피칭을 할 때 오히려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함성을 유도하는 듯 보였습니다.

전광판에는 경기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댄스배틀, 키스타임, 맥주배틀 등등을 쉴 새 없이 쏟아냅니다. 화면에 잡히는 남녀는 거침이 없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중들을 즐겁기만 합니다. 저도 시간이 흐르자 경기장에 익숙해졌습니다. 몸이 음악에 리듬을 탑니다. 관중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습니다. 아빠 없이 아들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도 있습니다. 아마도 여고 시절 야구 광팬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정겹습니다.

8회 초 SK 공격에서 두산 감독은 삼진을 4개나 잡으며 잘 던지고 있던 두산의 교체 투수 박치국을 김강률로 교체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김강률은 두 명의 타자를 잡아 투아 웃을 만든 후 포볼로 한 명의 타자를 1루로 내보냈습니다. 야구 전문가는 아니지만 김강률이 계속 던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감독은 김강률을 변진수로 교체하였고 변진수가 던진 초구를 SK 5번 타자 김동엽이 투런홈런으로 담장을 넘겨 버렸습니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려라]는 야구 격언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4대2로 경기가 역전되자 두산 응원석은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이제 9회 말 공격 한 번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두산 팬인 우리 회사 직원들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누군가 이제 집에 가자고 말할 정도로 다들 낙담한 표정입니다. 관중석을 돌아보니 자리를 많이 뜨고 있었습니다. 두산 응원단장이 애처롭게 외칩니다. "지금 가시면 후회하십니다. 계속 응원해 주세요." 그러나 인심은 야박하게도 꽉 찼던 1루 쪽 응원석의 절반 정도가 비었습니다.

9회 말 두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타자인 6번 타자 김재호가 안타를 치고 1루까지 갑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다음 타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전광판을 보니 그 제발의 주인공 [파레디스]입니다. 타율 1할 4푼 1리. 이런 타율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타율입니다. 2스트라이크 3볼 풀카운트에서 모든 두산 팬은 [제발]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8구째 헛스윙을 하고 3진 아웃되었습니다. 두산 팬들을 그를 욕할 기운이 없습니다. 허탈해할 뿐입니다.

간신히 희생플라이로 1점을 따라붙어 4대3입니다. 주자는 1루와 2루. 투아웃 상황에서 2번 타자 최주환이 등장하였습니다. 1루를 보고 있는 최주환은 방금 전 8회 초 2대2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던 상황에서 SK 타자가 친 공이 1루와 2루 사이로 총알같이 날아가는 것을 역모션으로 잡아내는 호수비를 펼친 바 있었습니다. 그 기운이 타석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은 있지만 과연 어떻게 될까요. 1구는 볼입니다. 2구를 최주환이 쳤습니다. 타구가 큽니다. 홈런입니다. 홈런. 9회 말 투아웃에서 터진 역전 스리런. 영화 같은 장면입니다. 모두 한결같이 일어섰습니다. 흥분을 어찌 표현하여야 할까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 표현 이상 더 정확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인생에 어려움을 겪을 때 꺼내 볼 응원 영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마디 하였습니다. "자! 한잔하러 가자."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6.4.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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