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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번째 편지 - 휴일의 [각본 탈출]

 

2018년 5월 7일 7시 반. 평소보다 1시간 반 늦게 잠에서 깨었습니다. 휴일이지만 버릇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책상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아무런 일정이 없습니다. 정말 오랜만의 온전한 휴일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2018년 5월 7일]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채울까요?

하루를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면 진정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요? 언스크립티드의 저자 엠제이 드마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프로그램화된 현대의 노예제도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컴퓨터의 운영체계처럼, 그 각본이 쇼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각본에서 일깨우기 위해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파란 알약을 삼키고 평범과 무지의 삶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빨간 알약을 삼키고 자유롭지만 불완전한 진실을 향해 번뜩 깨어나느냐." 영화 속 네오는 빨간 알약을 삼킵니다.

저는 책상에 앉아 [네오]라면 2018년 5월 7일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삶의 의미]를 탐구할 것 같았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에 이것보다 더 값진 것은 없을 것입니다. TV를 켜거나 웹 서핑을 하는 것보다 묵직한 고전을 꺼내 책상 위에 펼치는 것이 [자유롭지만 불완전한 진실을 향해 번뜩 깨어나는]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 고전 중 하나를 펼쳤습니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하나인 소포클레스의 비극전집입니다. 읽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 마지막 장을 보지 못한 책입니다. 그 책의 마지막 비극 [필록테테스]입니다. "그리스 지역의 왕자로 트로이 원정을 가는 도중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고름 냄새가 역하자 그리스 장군들은 그를 렘노스섬에 버리고 갑니다. 그로부터 10년을 비참하게 고통 속에 외롭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헤라클레스의 활이 있어야 그리스군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예언 때문에 그리스 장군들이 그를 찾아옵니다."

소포클레스는 비극 곳곳에 네오가 먹었던 빨간 알약을 심어 놓았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히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책을 읽다 보니 우리의 인생이 필록테테스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 모든 사람이 지닌 운명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길 바라지만 불행이 돌아 행운이 오듯 불행을 이겨내지 못하면 행운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10년을 보낸] 필록테테스는 "나는 마지못해 불행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소포클레스는 이 비극 말미에서 귀중한 교훈을 이야기합니다. "불행할 때는 고집을 버리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오."

책을 다 읽고 나니 9시경입니다. 아내가 아침을 먹으라고 재촉합니다. 어제의 과식으로 배가 그득합니다. 파란 알약은 [하루에 세 끼를 먹어야 한다]고 외치지만 빨간 알약은 [네 마음대로 하라]고 외칩니다. 저는 빨간 알약의 외침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 금식해보자. 물만 먹고 하루를 지내보는 거야. 어제의 과식에 대한 징벌적 의미로...'

아내는 병원을 간다고 외출하고 아이들도 모두 나가버렸습니다. 휴일의 아침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럴 때 각본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고 언스크립티드의 저자는 말합니다. 그는 우리를 모범 (M.O.D.E.L) 시민이라고 부릅니다. "의도치 않게 당신은 평범하고 (Mediocre), 고분고분 순종하고 (Obedient), 예속적이며 (Dependent), 오락에 정신이 팔리고 (Entertained), 생명력이 없는 (Lifeless), 각본화된 노예가 된다."

저는 각본화된 노예에서 벗어나고자 골프채를 몇 개 뽑아 간이 백에 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생전 처음 이런 모습으로 동네를 걸어봅니다. 누가 볼까 걱정도 되지만 뭐 어떻습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각본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각본에서 탈출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동네 골프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만석이랍니다. 다른 골프존에 가서 연습도 하고 가상 라운딩도 해봅니다. 각본에 없던 일입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본 탈출이 중요합니다.

먹지도 않고 골프채만 휘둘렀더니 피곤해집니다.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꿀 낮잠을 잤습니다. 아내가 정말 아무것도 안 먹냐고 묻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파란 알약]은 두 끼를 굶었다고 알려주지만 [빨간 알약]은 아직은 괜찮다고 속삭입니다. 무엇을 할까 서가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김상근 교수님이 작성해준 고전공부 교재가 눈에 띄었습니다. 늘 그 교재에서 중요한 대목을 발췌 정리하고 싶었는데 지금 그 일을 할 절호의 타이밍입니다.

[1강]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입니다. 교재를 읽다 보니 강의가 귀에 맴돕니다.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2800년 전에 던진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딧세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미 너울과 전쟁터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고생을 했소. 그러니, 이들 고난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Amor fati]"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는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네오]의 알약 선택을 거쳐 언스크립티드의 [각본 탈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호메로스는 이렇게 위로합니다. "전우들이여, 생각하건대 이번 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오!" 그렇습니다. 삶이 힘들어도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되지요.

강의를 하나만 더 읽어 봅니다. [2강 헤도로투스의 역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전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 곧 행복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옵니다. 누가 죽기 전에는 그를 행복하다고 부르지 마시고, 운이 좋았다고 하소서. 무슨 일이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께서 행복의 그림자를 언뜻 보여주시다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그리스의 현자 솔론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왕 크로이소스에게 한 말입니다.

이렇게 놀고 있는 사이에 6시가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들어왔습니다. 요즘 골프를 배우고 있는 그 아이를 데리고 우리 부부는 다시 골프존을 찾았습니다. 2시간여 가족들이 재미난 시간을 보냈습니다. 혼자 찾은 골프존도 재미있었고 가족과 찾은 골프존도 재미있었습니다. 누구와 오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오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고전과 씨름하였더니 마음이 한층 더 성숙해진 듯합니다.

하루는 이렇게도 지나가고 저렇게도 지나갑니다. 누군가가 만든 각본대로 살아도 되고 자신이 각본을 쓰며 살아도 됩니다. 무엇이 중요할까요? 빨간 알약을 먹으면 [자유롭지만 불완전한 진실을 향해 번뜩 깨어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로움일까요, 불완전한 진실일까요, 아니면 번뜩 깨어나는 것일까요?

2018년 5월 7일. 저는 책 읽고 골프존에서 골프치고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면과는 달리 내면으로는 [번뜩 깨어났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Sati(알아차림)]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8.5.8.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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