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590번째 편지 - 20년 만의 "이사"가 준 선물

 

지난주 금요일 드디어 이사를 했습니다. 20년 만에 방배동 서래마을에서 남부터미널 근처로 삶의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이사를 너무 자주 하여 이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 꿈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꿈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너무 오래 한곳에서 살았습니다.

인생의 3분의 1을 방배동에서 살았습니다. 40부터 60까지 살았으니 인생의 황금기를 이곳에서 보낸 것입니다. 좋은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이번에 이사를 하며 몇 가지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한곳에 오래 사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살았던 방배동은 조용한 주택가였습니다. 편의점을 가려 해도 300미터는 걸어야 했고, 그 흔한 커피숍도 500m는 가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사한 곳은 편의점도 커피숍도 30m 이내에 있습니다.

마치 강원도 산속에서 20년간 수련을 하다가 서울 한복판에 내려온 기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살았던 방배동 집이나 이사 온 남부터미널 근처 집이나 그 집을 선택할 때, 평수, 구조, 가격 등을 고려하였을 뿐 생활의 편의성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2004년 당시 대구지검 차장검사였습니다. 관사가 너무 낡아 법무부에서 관사를 교체해 준다며 아파트를 고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저는 당시 관사용 아파트를 고르는 조건으로 8가지 내걸었습니다.

오래되어 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중 두 가지는 첫째 대형 슈퍼가 있을 것, 둘째 아침 등산을 할 수 있는 뒷산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후보가 된 아파트들이 나머지 여섯 가지는 대부분 충족되었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아파트를 고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은 삶의 편의성과 주거환경의 쾌적성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저는 삶의 편의성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은 삶의 편의성을 포기하고 살아왔습니다. 만약 20년간 서너 번 이사를 하였더라면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 곳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적어도 주거 환경이라는 면에서는 저는 20년간 변화와 혁신 없이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두 번째는 인테리어를 하면서 일하는 제 스타일을 다시 곱씹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대적인 공사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20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니 벽지와 커튼, 가구 등을 고르는데 딸아이 친구인 인테리어 전문가의 조언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일하는 스타일은 네 가지 단계였습니다. 첫째 자주,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으로 인테리어 도면을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하였습니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상상을 하여도 현장을 한 번 보는 것만 못 하였습니다. 사진도 찍고 치수도 쟀지만 현장을 가 보면 늘 상상하던 것과 달랐습니다.

세 번째는 의견을 수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에게 가구 종류, 색깔, 배치 위치 등을 여러 번 변경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딸 친구에게는 미안하였지만 찜찜한 채로 인테리어를 하였다가는 훗날 후회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가 합리적인 의견으로 반대하면 더 이상 제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단계였습니다. 이 네 가지 단계는 그간 업무를 하면서 훈련되고 정립된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제가 이사하면서 느낀 것은 제가 가진 물건이 저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20년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작업을 하니 제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였던 물건들이 튀어나왔습니다. 그 물건 하나하나는 제가 어떤 이유에서건 신중하게 골라 돈을 주고 구입한 것들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그저 짐 꾸러미나 잡동사니라고 통칭 되지만 하나하나 의미가 있었고 생명이 있던 물건들입니다. 아마 지난 20년의 세월도 하루하루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겠지만, 훗날 돌이켜 보면 [방배동 시절 이십 년] 이라는 여덟 글자로 표현될 것입니다.

또 물건들도 가만히 보면 몇몇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가장 큰 그룹은 책입니다. 이러리라 예상하여 책장을 좀 넉넉하게 샀지만 책장에 못 들어가는 책들이 제법 있습니다. 저는 20년간 책과 함께 살았나 봅니다.

그다음으로 많은 것이 전자 제품입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정리를 하였고 이제는 대부분의 전자제품이 핸드폰으로 통합되어서인지 생각만큼 많지는 않습니다. 그다음이 옷입니다. 그러나 그저 일반인들 수준으로 적정한 양입니다. 오히려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많은 것이 약입니다. 무슨 약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아마 20년 동안 꽤 아팠던 모양입니다. 물건을 정리하며 하나하나 쳐다보니, 2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래 그땐 그랬어. 죽을 만큼 힘든 일도 있었는데 잘 버텨 왔구나.' 그 시기를 같이 버텨온, 아니 버티게 해 준 책이나 옷 또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물건을 손에 잡으면 그때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주말 내내 짐 정리를 하였더니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습니다. 이사라는 사건은 저에게 20년의 인생을 돌아볼 시간과 여유를 선물했습니다. 이사는 속성상 힘들고 고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사는 지난 인생을 만나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사는 어떤 의미가 있으셨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9.10.21. 조근호 드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전글 목록으로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