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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번째 편지 - 저는 '선의의 독재자'였습니다

 

저는 사정상 집을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아래층에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동생네 집이 이사 가야 할 사정이 생겨 윗집인 저희 집과 아랫집인 동생네 집, 두 집이 한꺼번에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7월 17일 아내와 저는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이사 갈만한 집을 구경하게 되었고, 같은 시각 동생도 이사 갈만한 다른 집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아흔이 넘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관계로 저희 형제는 가급적 같은 아파트 같은 통로에 두 집을 구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이렇게 저희 입맛에 딱 맞는 집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어렵사리 두집을 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그 집들을 보러 간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같이 갔고, 동생은 제수씨가 미국에 있어 방학을 이용하여 잠시 귀국한 조카를 데리고 집을 보러 왔습니다.

저는 무심결에 동생이 뭐 하러 조카를 데리고 왔지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습니다. 조카는 미국에서 살고 있고 미국 대학교에 입학하여 사실 그 집에서 지낼 날도 얼마 되지 않는데 친구와 놀기 바쁜 아이를 왜 데리고 왔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날 일이 잘 풀려 저희와 동생네는 그날 본 집을 이사 갈 집으로 결정하고 저는 1시간 후 계약까지 마쳤습니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 것입니다. 일이 꼬이면 한정 없이 늘어질 이사가 너무도 손쉽게 결정이 되어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속으로 후련하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족 카톡방에 메시지를 썼습니다. "우리 이사 갑니다. 오늘 계약했어요. 이사 날짜 10월 17일." 저는 기쁜 마음으로 카톡 메시지를 썼고 당연히 기분 좋은 반응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딸아이의 카톡 반응은 "꺄!!!!!!!"이었고 아들 녀석의 반응은 "!!!"이었습니다. 좋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저의 기분 위주로 생각하여 다들 당연히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날 밤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아들 방에서 이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아내와 저는 새로 이사 갈 집의 구조를 설명하여 그 집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열심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반응은 그다지 우리 부부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합니다. "이사 가는 문제는 저희와 미리 상의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좀 그러네요. 저희가 의견을 낸다고 뭐 달라지는 것은 없었겠지만…" 어라 이 반응은 우리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순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이 한마디 더 거듭니다. "뭐 돈도 아빠가 내실 거니 제가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허허 점입가경입니다. 일단 후퇴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으로 "미안해" 하고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아내가 뒤따라 나오면서 진지하게 한마디 합니다. "여보 우리가 잘못한 것 같아요. 정식으로 사과합시다." 미안해 한마디로 충분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들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였습니다. "엄마 아빠가 이사 가는 문제를 너희들과 미리 상의하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한 것은 잘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저는 사실 이사 문제는 저와 아내가 결정하고, 인테리어를 하거나 기구를 구입하는 문제를 아이들과 상의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는데 의외의 일격을 당한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상대방에게, 그것도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 다음날 출근하여 간부 회의를 하면서 간부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사 갈 집을 결정할 때 자녀들과 상의하여 결정하나요?" 이 질문에 모두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느 임원은 자신이 어릴 때 아버지께서 이사 갈 집을 미리 데리고 가 의견을 구하신 기억이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반면 어느 임원은 자기가 군대 휴가 갔다 나오니 집이 이사 가고 없더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한결같이 자녀들의 의견을 물어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자녀들이 전학을 할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생활권이 바뀌니 당연히 가족 구성원에게 의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누가 내느냐는 아무런 잣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문제를 저 혼자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아들 녀석이 태클을 걸지 않았더라면 저는 결코 제 결정이 세상의 표준과 벗어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주제로 사람들에게 질문하였고 대답은 한결같이 이사 갈 집을 결정할 때 자녀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반대로 생각하고 살고 있었을까요.

저는 결과가 중요하였습니다. "가족들이 살기 편한 집" 저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결정은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을 다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제 특기 중 하나이니까요.

맞을 겁니다. 가족들이 한 달을 걸쳐 노력하여도 제가 내린 결론보다 좋은 결론을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절차]였습니다. 소위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듣는 청문 절차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절차]보다 [결론]이 중요한 세상을 오래 살았습니다.

저는 어쩌면 마음속으로 청문 절차가 비합리적인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사고방식이 합리적이고 가족들의 이익을 위하는데 헌신적인 가장입니다. 저는 당연히 가족들을 위해 최상의 결론을 도출할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선의의 독재자일 뿐입니다. 아무리 선의여도 독재자는 독재자입니다. 민주적 절차가 결여된 것이지요. 아들이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압니다. 저는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가 봅니다.

이 문제는 비단 가족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회사 경영이나 외부 모임 운영에서도 똑같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선의의 독재자냐 아니면 민주적 리더이냐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제가 민주적 절차에 취약하다는 것을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는 바람에 묻혀 지내왔을지 모릅니다.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문제도, 기업이 겪고 있는 문제도 이런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상위층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리더들은 선의의 독재자가 선정을 베풀던 추억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이고요.

이 문제를 깨닫기는 하였지만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미 그런 시대는 끝이 났으니까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9.7.29.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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