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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번째 편지 - 발레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

 

지난 수요일 난생 처음 혼자 발레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여행에서 발레에 눈을 뜬 저는 연말까지의 발레 공연을 모두 예약하였지만 유독 이 [안나 카레니나] 만큼은 전석 매진이 되는 바람에 표를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좋은 좌석 1개가 예약 취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구해 공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안나 카레니나]의 제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그 소설을 읽지 못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사전에 줄거리라도 알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고전 5미닛]에 있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습니다. 5분 만에 줄거리를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고전 5미닛]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5월의 어느 일요일 밤, 한 여인이 달리는 기차를 향해 뛰어든다." 그 여인은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불륜이 자살로 막을 내린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의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가 1887년 쓴 장편소설로 [전쟁과 평화], [부활]과 함께 그의 3개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작입니다.

19세기 러시아 상트페레르부르크,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안나 카레니나는 귀족 남편에 아들까지 둔 모두가 주목하는 상류사회의 꽃입니다. 겉으로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인생에 어느 날 운명처럼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오빠 부부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젊은 장교 브론스키 백작을 마주칩니다. 첫눈에 반한 두 남녀는 사랑에 빠지고 불륜을 저지릅니다. 그 불륜은 임신으로 이어지고 우여곡절 끝에 사랑의 도피로까지 이어집니다. 오랜 유럽 여행 끝에 돌아온 두 사람, 안나는 러시아 사교계의 배척으로 브론스키의 영지에 고립되고 점점 브론스키에게 집착하는 반면 브론스키는 안나로부터의 자유를 갈구합니다.

자신의 사랑이 막을 내리는 것을 직감한 안나는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고 어떤 것을 보아도 소름이 끼치게 된다면 촛불을 꺼버려도 되지 않을까"라는 말을 남기고 브론스키를 처음 만난 기차역에서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합니다.

[고전 5미닛]을 통해 대강의 줄거리를 확인하고 공연장인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를 찾았습니다. 팸플릿을 사서 장면 하나하나를 미리 공부해 두었습니다. 혼자 간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혹시라도 누구를 만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위를 살려보니 혼자 온 듯한 관람객도 적지 않아 보였습니다. 발레 공연에 집중하여야 하는데 이런 쓸데없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저는 아직 어설픈 풋내기임이 틀림없습니다.

발레 [안나 카레니나]의 첫 장면은 제가 가진 선입견을 모두 확 뒤집어 놓았습니다. 기차역을 표현한 고급스럽고 기품있는 무대 모습은 발레인지 연극인지 뮤지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음악이 흐르고 무용수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걷는 모습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그제서야 "이것이 발레이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을 정도입니다.

흑백을 주조로 한 무대의상은 '러시아'라는 단어가 전해주는 광대함, 묵직함, 담백함 등을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흑백이 이토록 아름답고 관능적인 줄 몰랐습니다. 춤은 점점 빨라 지며 장면이 바뀔 때마다 줄거리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독무, 이중무, 군무 등이 화려하게 무대를 수놓습니다.

인간의 몸동작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격조 있고 절도있는 춤사위는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숨 막히는 동작들이 이어집니다. 아무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습니다. 모두 숨을 정지해 버린 것 같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파티가 열렸습니다. 무대 배경은 까만 천뿐입니다. 오른쪽 상단에 멋있는 샹들리에 2개가 없었더라면 무도회장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제 흑백에 색조가 입혀집니다. 파스텔 톤의 남녀가 쌍을 이루며 군무를 합니다. 환희와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이 서린 러시아 귀족사회의 독선과 억압을 상징하듯 모든 것이 검은색입니다. 무대 바닥도 무대 배경도 심지어 자작나무마저 침울합니다. 이 침울함이 무용수의 화려한 춤과 묘한 대조를 이루어 슬픔을 자아냅니다. 곧 들이닥칠 안나의 불행, 아니 러시아 귀족사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그래도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잊게 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타오르는 열정의 포로가 됩니다. 기존의 모든 위선과 가식을 벗어버리고 감정에 충실합니다. 그들의 정사 장면이 춤으로 표현됩니다. 한 몸이 되어 금지된 사랑을 표현하는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이 고정됩니다. 영화나 연극에서 표현한 정사신보다 훨씬 화려하고 격정적입니다.

중간에 목이 간지러워 잔기침을 몇 번 하였더니 옆자리에 있는 여성 한 분이 물을 마시라고 물병을 건네주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막간에 말을 몇 마디 하게 되었는데 발레 광팬이었습니다. 11월 1일부터 5일까지 하는 [안나 카레니나]를 매일 관람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안나 역만 발레리나 세 명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각 발레리나의 춤이 다르고 상대역에 따라 호흡이 달라져 공연을 여러 번 보더라도 다 다른 공연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러면 모든 발레 공연을 모두 이런 식으로 관람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긴 친구들도 저를 좀 특이하다고 해요." 발레 공연 풋내기인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설명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법도 하였습니다. 2막까지 125분의 공연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금방 흘러갔습니다. 국내에서 발레공연을 제대로 본 것이 처음이었지만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디디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됨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집에 와서 다시 한번 [고전 5미닛]의 [안나 카레니나]를 보았습니다. [고전 5미닛]은 줄거리를 요약 설명한 다음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적으로 완전무결하여 현대 유럽 문학 중 이 소설에 견줄 만한 작품이 없다"는 표도르 도스토예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안나 카레니나]가 지금까지 이렇게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통해 위선과 가식에 빠져있는 러시아 귀족사회에 의문을 던졌다고 평가합니다. 안나의 결혼생활은 겉으로는 행복한 것 같았지만 소통도 없고 자유도 없는 위선과 가식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해 브로스키와 불륜에 빠졌으나 이 역시 비극으로 마감하고 만 것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사랑에만 탐닉한 나머지 함께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론하고 있었습니다.

안나가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저는 발레와 사랑에 빠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랑은 파멸로 치닫지 말고 저를 성장시켰으면 합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7.11.6.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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