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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번째 편지 - 춘천 가는 길에 만난 피천득의 [인연]

 

지난 주말 춘천을 갔다 왔습니다. 춘천에서 근무를 한 적이 없어 춘천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없지만 '춘천을 간다는 것'은 언제나 설렘이자 아련함이요, 애틋함입니다. 무엇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피천득의 그 유명한 수필 [인연]의 마지막 구절 때문입니다.

"오는 주말(週末)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昭陽江) 가을 경치(景致)가 아름다울 것이다."

십수 년 전 서점에서 문득 책 제목에 눈길이 머물러 산 적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은 [다시 읽는 국어책(고등학교)]이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고등학교 때 배웠던 국어 교과서의 주옥같은 문장만 모아 놓은 책이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부터 시작하여 [광야](이육사), [서시](윤동주)로 이어지는 제목들은 저를 목메게 했습니다. 십 대 후반의 조근호가 눈앞에 오버랩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생 한 명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박목월의 [윤사월]을 낭송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윤사월]은 단순히 시가 아닙니다. 우리의 추억이요, 아픔이요, 처절함입니다. 그 시에는 우리의 청춘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의 글들이 똑같은 무게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글은 그런 글이 있었는지 아득하기도 하고 어떤 글은 바로 어제 읽은 듯 또렷하였습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은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느 글인지 기억나시나요. 바로 민태원의 [청춘예찬]입니다.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은 '청춘'이 아니라 '청춘예찬'입니다. [청춘]은 우리 가슴속에 홀로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라 늘 [예찬]의 호위를 받는 여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티첼리가 그린 그림 '비너스의 탄생'에 나오는 주인공 비너스와도 같은 존재 말입니다.

책을 더 읽어 봅니다. 정극인의 [상춘곡], 알퐁스 도데의 [별], 정비석의 [산정무한], 김동리의 [등신불], 이양하의 [페이터의 산문], 안톤 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 어느 하나 가슴을 저미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제 심장이 뛰는 것은 이 글들이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펌프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한 번도 낙엽을 태운 적이 없지만 가을이 되면 늘 가슴 속에서 낙엽을 태웁니다. 바로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때문이지요. 이 수필 때문에 '낙엽을 태우는 행위'는 그저 낙엽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를 태워 그 안에서 추억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의식이 되었습니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중략)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 - 땅속에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책을 읽고 고교 선후배 모임의 부부동반 가을 야유회를 춘천으로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저녁을 먹고 통기타 카페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그 책의 주요 부분의 복사본을 나누어 주고 7080 노래 중간 중간에 한 사람씩 나와 그 글을 하나하나 읽게 하였습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기억나시나요.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릴케의 [가을날]입니다. 어두운 불빛 속에서도 참석자 모두의 눈가가 촉촉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십수 년이 지났습니다. 그 춘천을 지난 주말 다시 찾은 것입니다.

고교 교과서의 대표적 수필 [인연]의 작가 피천득은 아사코라는 여인을 평생 세 번 만나는 인연이 있었습니다. [인연]을 쓰던 때로부터 수십 년 전 동경 유학 시절 하숙집 꼬마 아가씨로 아사코를 만난 것이 첫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그가 동경을 떠날 때 아사코는 그의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추면서 반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십 삼사 년이 지나 다시 동경을 찾았을 때는 그녀는 동경 성심 여대 삼학년이었습니다. 꼬마 아가씨 시절 동화책 표지의 예쁜 집을 보면서 '이담에 이런 집에 같이 살아요.'라고 하였던 그녀와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며 두 번째 만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또 십 년 후 한국이 해방을 하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피천득은 그녀와 세 번째 만남을 합니다. 한국이 일찍 독립되었으면 아사코와 같은 집에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름다운 상상을 하던 그가 만난 아사코는 그리움 속 그녀가 아니었습니다. 미군 장교임을 뽐내는 일본인 2세와 결혼한 아사코는 백합같이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사코와 악수도 없이 헤어진 세 번째 만남을 안타까워하며 수필 [인연]을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수필 [인연] 속 피천득은 춘천에 가고 싶어 합니다. 춘천에는 아사코가 다닌 동경 성심 여대의 자매 학교인 한국 성심여대가 있습니다. 아사코는 없지만 피천득의 [인연]이 있는 그 춘천을 지난 주말에 다녀왔습니다. 춘천 가는 길에 차장에 부딪히는 추색(秋色)의 산자락을 보면서 문득 [인연]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오는 주말(週末)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昭陽江) 가을 경치(景致)가 아름다울 것이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7.10.30.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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