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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번째 편지 - 여러분 발레를 좋아하시나요

 

혹시 발레 좋아하시나요. 저는 평생 발레 공연을 한 번 보았습니다. 오래되어 제목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백조의 호수였을 것입니다. 어느 분이 부부동반으로 초대하여 갔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공연 도중에 졸은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저는 평생에 발레 공연을 반 번쯤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 제가 지난번 우즈베키스탄 여행에서 발레 공연을 네 번이나 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우즈베키스탄 여행 중 인솔자인 도용복 회장께서 저녁에 공연이나 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저는 예의상 좋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일행들을 데리고 간 공연장은 우즈벡 나보이 극장(The Navoi Theater Uzbek)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는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예술의 전당이었습니다.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가 얼마 전에 재개관하였다는 나보이 극장은 꽤 큰 규모의 멋진 외관을 자랑하는 극장이었습니다.

도 회장께서 티켓팅한 것은 8월 13일과 14일의 공연이었습니다. 여행을 와서 이틀 저녁 공연을 본다는 것이 공연을 좋아하지 않은 저로서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도 회장의 성의에 가기로 한 것입니다.

8월 13일 공연은 발레였습니다. 제가 평생 반 번 밖에 구경하지 않은 그 발레 말입니다. 공연 제목은 그래도 다행히 우리가 다 아는 [아라비안 나이트], 즉 [천일야화]였습니다. 공연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장에서는 왕비의 부정으로 분노한 샤리아 왕이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를 하고는 죽이게 되는데 대신의 딸 세헤라자데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하루 동안 재미난 이야기를 하였다는 천일야화의 배경 설명을 발레로 공연하고, 2장, 3장, 4장에서 세헤라자데가 한 이야기 중 너무나도 유명한 [신밧드의 모험],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발레로 표현하였습니다. 마지막 5장에서는 샤리아 왕이 분노를 거두고 세헤라자데와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해피엔딩을 발레로 표현하였습니다.

영어 팸플릿으로 내용을 읽고 들어갔지만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지만 아는 내용이라 그럭저럭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일행들은 별 흥미가 없는 눈치였습니다.

그 다음날은 오페라였습니다. 그 유명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였습니다. 그러나 오페라는 발레보다 더 재미없었습니다. 우선 가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음악도 친숙한 곡이 몇 곡 되지 않아 지루했습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깨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시차'는 무거운 눈꺼풀 위에 눌러앉아 내리누르고 있었고 그 힘을 버틸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알마비바 백작이 첫눈에 반한 로시나와 결혼하는 우여곡절을 그린 오페라이지요. 피가로의 도움으로 로시나의 후견인이자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바르톨로를 따돌리고 결혼에 성공하지요. 그러나 이런 스토리를 알아도 가사를 모르니 재미가 뚝 떨어졌습니다. 얻은 수확이 있다면 칠레 와인 알마비바(Alma viva)가 이 오페라에 나오는 알마비바(Almaviva) 백작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스페인어로 알마(Alma)는 영혼, 마음이고 비바(viva)는 '살아있는, 열정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 vivo의 여성형입니다. 그러니 Alma viva는 살아있는 마음, 열정적인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인터넷에서 와인 알마비바를 찾아보니 이런 멋있는 해석이 있더군요.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알마비바 백작은 로시나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후속작인 [피가로의 결혼]에선 로시나와의 결혼생활에 권태기를 맞았는지 바람기를 드러낸다. 그 때문일까. 알마비바 와인은 마시는 사람에 따라 젊은 백작의 순수한 열정이 느껴질 수도 있고 바람둥이 백작의 중후한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 어떤 맛을 느낄지, 그것은 오롯이 알마비바를 마시는 사람의 몫이자 권리다."

문제는 그 오페라 공연을 마치고 나와서였습니다. "조 변호사님 내일 다른 일행들은 한국으로 귀국하는데 조 변호사님과 저는 저녁에 별 할 일이 없으니 공연 구경하시면 어떨까요." 허허 또 공연이라니 무슨 공연이 열리는지도 안 알아보고 무조건 공연을 구경하는 도 회장은 분명 공연 애호가임이 틀림없지만 저에게는 힘든 일이 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체면상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흘째 8월 15일의 공연은 [사랑의 부적(The amulet of love)]이라는 발레였습니다. 또 발레였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공연에 집중하였습니다. 남자 무용수 발레리노와 여자 무용수 발레리나가 혼자 추는 춤, 둘이 추는 춤, 여러 명의 무용수가 나와 추는 군무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마침 벼룩시장에서 산 망원경이 있어 무용수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팸플릿을 통해 줄거리도 알고 있고 무용수들의 동작도 하나하나 살피게 되자 그 동안 무관심하던 발레에 묘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단순한 관심은 흥미로 발전하였고 발레 공연이 끝날 즈음에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면서 저는 도 회장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은 이틀 저녁 모두 공연 보시죠. 일정표에 보니 내일은 창작 발레이고 모레는 유명한 발레 공연 해적이던데 내친김에 모두 보시죠." 도 회장은 당연히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네 번째 발레 공연 [Hamsa]와 다섯 번째 발레 공연 [해적]을 모두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발레 공연은 우즈베키스탄 창작 발레라 도 회장께서도 별 흥미가 없는 듯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팸플릿을 읽고 쉬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찾아 공연의 줄거리와 의미를 찾아 도 회장께 알려 드렸습니다. 멘토와 멘티가 뒤바뀐 것입니다.

[Hamsa]는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작품입니다. 이 공연이 열리고 있는 극장 명칭이 나보이 극장입니다. 나보이가 무슨 뜻일까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공연을 보고 그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나보이는 사람 이름이었습니다. 알리세르 나보이(Alisher Navoiy)는 1441년 태어나 1501년 죽은 우즈베키스탄 문학의 창시자이며 정치가입니다. 왕국의 장관을 지내며 학교 병원 등을 지어 서민을 도왔고 문화 창달에 기여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나보이를 존경하여 도시명, 극장명, 도로명 등에 나보이 이름을 사용하여 그분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Hamsa]는 나보이의 작품 중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5개의 서사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발레 [Hamsa]는 그 다섯 편의 이야기를 발레로 만든 것입니다. 네 가지 이야기는 우즈베키스탄의 이야기라 잘 모르는 내용이었지만 마지막 다섯 번째 이야기는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알렉산더가 이 먼 우즈베키스탄까지 원정을 온 모양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우즈베키스탄과 수교를 하고 지내고 있지만 우리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나보이와 [Hamsa]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Hamsa]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큰 호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지막 날은 발레 공연으로 유명하다는 해적이었습니다. 발레를 네 번이나 보니 이제 춤 동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가 잘 추는지 못 추는지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님이 강의 중에 발레는 운동 경기와 달리 힘이 들어도 표정은 웃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중노동이라고 말씀한 것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공연이 거의 끝날 무렵 독무를 하던 주인공 남자 무용수가 힘이 부치는지 자세가 흐트러지더니 주저앉았습니다. 곧 일어났지만 다음 무용부터 박자가 잘 맞지 않고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하였습니다. 공연의 성공 여부를 떠나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발레에 애정이 생긴 것입니다. 무관심이 관심으로, 관심이 흥미로, 흥미가 재미로 발전하더니 드디어 애정으로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제 생애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상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발레 마니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귀국한 후 금년 연말까지 하는 발레 공연을 모두 찾아 티켓을 샀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발레 공연이 인기가 있어 11월 1일부터 5일까지 하는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는 티켓을 구입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번 발레 공연이 기다려집니다.

여러분은 발레를 좋아하시나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7.10.23.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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